[도전 & 변신] 현대重 출신 환갑지난 노병들만으로 회사 차린 김창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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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원 할아버지,벌써 다 했습니까? 좀 쉬시죠." "형님이라고 안 부를거야.나 혼자 일 다했다고 쉬면 되나."
울산시 울주군 온산읍의 조선기자재 전문 업체인 신한기계 작업장. 30대 공사반장이 날카로운 철판 위를 오르내리며 용접 상태를 살피는 아버지 뻘로 보이는 일꾼을 바라보며 제발 휴식을 취하라고 하소연하듯 소리를 지른다.
할아버지라는 말에 얼굴을 붉히는 그는 현대중공업 핵심 협력업체인 신한기계에 선수(船首),선미(船尾)블록을 납품하는 혁신기계의 김창원 사장이다. 김 사장은 올해 69세.사장뿐만 아니라 종업원 60명 모두가 현대중공업을 정년퇴직한 '60대'들이다.
이 회사 직원의 평균 연령은 64세. 김 사장도 현대중공업에서 선박 철판의 골격을 유지하기 위해 가용접하는 취부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장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런 그도 세월은 이기지 못했다. 김씨는 1994년 30년간 일한 직장을 떠나야 했다.
"퇴직하고 첫 1년간은 사실 시간가는 줄 몰랐지.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자식들 눈치를 보고,결국 우울증을 앓게 되더군."
그는 함께 정년퇴직한 동료들도 같은 고통에 시달리는 것을 확인하고,조선 협력업체에 재취업하자고 제안했다.
젊은이들이 조선 일을 꺼리는 덕분에 일자리는 의외로 얻었지만 직장 재적응이 쉽지 않았다. 현대중공업 출신이라는 자존심을 버리지 못한 노병들은 협력업체의 기존 인력들과 마찰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임금 차별이 심한 것도 견디기 힘들었다.
김씨는 오기가 생겼다.
"60대지만 정신과 육체는 거친 일에 익숙하지 않은 30대보다 나아.우리가 배 만드는 기술은 세계 1등인데,이 기술을 그냥 묻어 두는 것은 국가적인 손실이야…. 이런 생각을 하면서 차라리 창업을 하자고 결심했지."
가족들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퇴직금을 몽땅 털어 2001년 4월 정년퇴직한 동료 12명을 모아 회사를 차렸다.
정년퇴직 7년여 만에 창업주로 변신을 한 것. 이때 그의 나이 65세였다.
김 사장은 현대 출신 동료들에게 서약을 요구했다. 늙은 신입사원들은 김 사장 앞에서 '우리에게 화려한 과거는 없다.
오로지 실력만으로 경쟁에서 이긴다'는 서약서를 썼다.
마침 이즈음 현대중공업이 '퇴직인력을 재고용하는 협력업체에 안정적인 부품 공급을 하겠다'고 약속하는 퇴직사우 지원 지침을 내놓았다. 이 덕분에 걱정했던 일거리를 한결 쉽게 확보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얼마 후 신한기계(대표 한기석)에서 대형 선박 블록용 철구조물 작업 물량을 처리해 달라는 주문이 날아왔다.
7년간 노는 데 지쳐 있던 노병들은 마치 물 만난 고기들처럼 일터에 뛰어들어 작업에 몰두했다.
환갑을 넘긴 직원들이 철판을 자르는 위험한 작업을 능숙한 솜씨로 처리해내고 미세한 기술을 요하는 용접도 한 치의 오차 없이 말끔히 해냈다. 한 달에 평균 1800t의 철구조물 작업을 거뜬히 해치웠다.
신한기계측은 깜짝 놀랐다. 이 회사 관계자는 "아무리 현대중공업 출신들이지만 솔직히 나이 드신 분들이 제대로 해낼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만 납기를 어기지 않았을 뿐더러 품질도 너무 좋아 즉시 주문을 배로 늘렸습니다."
매출은 연간 10억원대로 올라섰고 창업 첫해부터 순이익이 났다.
작년에는 신한기계 협력업체 중 최고 품질과 생산성으로 '우수 협력업체상'을 받기도 했다.
실적과 순이익이 늘어나면서 봉급도 웬만한 중견기업 못지 않다 보니 젊은이들의 입사 문의가 쇄도하고 있지만 입사 실적(?)은 전무하다. 김 사장이 '퇴직자들의 요람'으로 키운다는 창업 정신에 따라 입사 자격을 60세 이상 퇴직자들로 제한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 회사 최고령자인 전국명씨(70)는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침에 출근할 '일터'가 있다는 것"이라며 "적어도 10년은 더 일할 수 있다"고 기염을 토했다.
여직원 김매자씨(62)는 "손자 눈치까지 봐야 했는데 직장이 생기면서 일에서는 자부심이,생활에서는 자신감이 붙고 있다"고 말했다.
"인생에 정년퇴직이 어디 있어.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면 저승사자도 왔다가 그냥 가는 법이지." 김 사장은 "몸의 나이는 마음을 따라가는 법"이라며 "하루 일을 끝마치고 막걸리 한잔을 마실 때면 한 살 더 젊어지는 느낌이 든다"며 환하게 웃었다.
울산=하인식 기자 hais@hankyung.com
나이 들고 느리고 약한 이들은 점점 발 붙일 곳이 없어지는 세상이다.
더욱이 조기 퇴직의 칼바람을 맞은 중장년층은 어떤 일이든 계속 하기를 원하지만 녹록지 않다.
있다 해도 식당 등 소규모 자영업을 시작하거나 아파트 경비,상점 판매원,청소원,주차장 관리 등 근로 여건이 열악한 사회 저변 업종이 대부분이다.
퇴직자가 창업에서 성공하려면 초라하게 물러앉기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새로운 목적과 기쁨을 찾으려는 정신 무장을 확고하게 해야 한다.
무리하게 사업을 벌이는 모험은 곤란하다.
예전 직장 경험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분야를 선택한 다음 3년 정도 시장 흐름을 세심하게 살펴보고 나름대로 마케팅 전략도 마련하는 등 사전준비 기간을 충분히 가져야 한다.
60대 이후에는 자신의 몸으로 경제활동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의 몸을 빌리는 지혜도 필요하다.
업종을 선정하고 나면 과거 신분이나 경력 등에 대한 미련은 철저하게 버려야 한다.
나이에 주눅들지 말고 건강을 잘 관리해야 한다.
끊임없이 배우고 유연한 사고를 만들어가야 한다.
정부 차원에서 퇴직 인력들이 효율적으로 재활용될 수 있는 컨설팅 시스템이 하루 빨리 갖춰졌으면 좋겠다.
/김창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