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데스크] 敵意의 제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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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고 기업이 환영받았던 적은 없었다"고 루트비히 폰 미제스는 썼다.
정치판과 노동조합은 물론이고 TV드라마 작가, 유행가 가수와 할리우드를 거쳐 심지어 스트립 댄서들까지 강력한 반기업 동맹을 형성하고 있다는 그의 개탄은 정작 미국이 아니라 작금의 한국에 더 어울린다.
극심했던 미국의 반기업 정서는 80년대 초반까지의 깊은 불황을 경험한 다음에야 서서히 꼬리를 내리게 된다.
60,70년대의 강력한 경제성장과 그에 필적할 만큼 드높았던 반기업정서는 경제가 죽고 수도 없는 기업이 폐사하고 일본 기업들에 본토를 유린당한 다음에야 때늦은 후회와 연민을 등에 업고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것은 마치 고뇌하며 흔들리는 이념의 시계추와도 같았다.
IT버블과 광풍의 스톡옵션들,소위 전문경영자 독재시대와 급기야 사베인스-옥슬리 법안이 작성되는 시기를 거쳐 집단소송의 봇물을 다시 통제하려는 최근의 미국에서조차 반기업정서는 언제나 '기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핵심이었다.
마이클 밀큰과 엔론 월드컴의 분식회계,온갖 증권사기…,그랬으니 반기업 캠페인은 언제나 정당성을 공급받아왔다.
한국에서라면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한국의 기업과 기업가를 '때려 잡아야 할' 이유는 더욱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독재자와 어깨를 나란히 했으며,월남전 용병으로 일어섰고,노동조합을 탄압했으며,소비자를 업수이 여긴 데다,무엇보다 이 시대의 새로운 주류들이 볼 때는 '잘못된 시대'를 살아냈다는 이유만으로도 기업과 기업가는 감독과 규제를 받아 마땅한 것이다.
온통 오류 투성이였던 한국에서 성공을 거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데 더이상 길게 언급하면 사상이 불온한 자의 푸념이 될 뿐이다.
정부와 지식인들이라고 해서 결코 반기업 동맹에서 제3자는 아니다.
개혁의 이름 아래 반기업 정서를 교묘하게 위장하고 있으니 더욱 가소로울 뿐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기업들의 투자계획을 건별로 심의하겠다고 달려들면서 겉표지를 떡하니 '시장개혁'이라고 붙여놓는 것이나 기업경영권을 사회화,공공화하는 도구로 소액주주라는 무기를 들고 뛰면서 애써 주주 자본주의를 위해서라는 일각의 주장에 이르면 차라리 언어의 유희가 되고 만다.
외국인 투자자라는 딱지만 붙여놓으면 그것의 정체가 무엇이든 상전 모시듯 하면서 정작 내국인 대주주는 사돈의 팔촌까지 지분족보를 공개하겠다는 것이니 반기업 정서라기 보다는 차라리 적의(敵意)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위장(僞裝)도 도가 지나치면 본질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굳이 외국인 자본에 대해서는 한껏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것이 자신의 반기업,반시장 행보를 위장하기 위함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서 지금껏 대형은행의 리더십은 외국은행 출신들로 채워지고 은행 소유권은 언제나 외국자본에 인계되고 있는 것이며 기업을 공격하는데 자주 동원되는 무기들은 대체로 월스트리트에서 개발된 것들이다.
재벌보다는 외국자본이 낫다는 이 굴종적 태도는 과연 나라경제가 결딴나기 전에 치유되기나 할 것인지….
변호사 천국 미국에만 있는 집단소송제와 그 미국에도 없는 출자총액제 및 계좌추적권, 끊임없이 이어지는 반기업 규제의 명단을 들추자면 규제의 박물관이요,반기업 정서의 생체실험실로 불러 마땅할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무너져 주저앉기를 원망(願望)했던 적은 없다.
지금 국회는 그런 법안들을 무더기로 통과시키고 있다.
정규재 경제담당 부국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