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시단] '저녁때' .. 이기철

건강한 낯빛으로 저녁이 찾아오면 나는 내 먹던 상추쌈과 아직 뚜껑 열지 않은 한 그릇 더운 밥 그에게 밀어 주리 우엉잎을 스치고 온 바람에 손 씻고 정구지 다발에 머리 빗은 향긋한 저녁이 찾아오면 나는 오래 잊고 지내던 옛날 노래 한구절 악보 없어도 서툴지 않게 그와 함께 부르리 물풀레 잎새에 내린 별빛이면 불 켜지 않아도 그의 희게 웃는 입모습과 훨씬 크고 넓어진 가슴팍 흠뻑 보이리 5월이 지나는 길 가 징검다리 건너 밀 이삭 스치는 바람 소리를 그가 아니면 누가 데려 오리 그의 입김으로 키가 큰 나무 그 나무 아래 옷 벗어 발가숭이된들 내 무얼 부끄러워하리 모든 것 배고 낳는 여름 저녁이 건강한 날빛으로 찾아오기만 하면 시집 "열하를 향하여"에서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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