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브뤼셀, 튀니지 출신의 압데사테르, 말리카 부부는 무심히 TV를 보다가 뜻밖의 감정에 휩싸였다. TV 속 인물의 외모와 눈동자, 표정에 걷잡을 수 없이 매료됐던 것이다. 이들은 곧 황홀경에 빠졌다. 압데사테르 부부는 그를 알게 된 지 1년 만인 2001년 9월9일, 기자로 위장하고 아프가니스탄 북동부 지방에서 자살폭탄 테러를 일으켜 탈레반에 저항해 온 아흐마드 샤 마수드 장군을 살해했다. TV 속 남자 오사마 빈 라덴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훨씬 전에 오사마 빈 라덴의 매력을 알아본 이가 있었다. 오사마의 사촌동생인 나지와 가넴이다. 10대 소녀에 불과했던 나지와는 어렸을 때부터 오사마의 매력에 푹 빠졌다. 오랫동안 오사마를 좋아한 나지와는 결국 좋아하던 테니스와 자동차 운전을 포기하고 그의 ‘첫 번째’ 아내가 된다.

프랑스 여성작가 디안 뒤크레의《독재자를 사랑한 여인들》은 빈 라덴을 비롯해 북한의 김정일,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이란의 호메이니, 유고슬라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등 독재자 여섯 명의 ‘사생활’을 재조명한다. 무소불위의 철권을 휘두른 독재자의 사랑을 통해 역사의 속살과 한 인간으로서의 독재자를 재조명하려는 시도다. 저자는 위험을 무릅쓰고 독재자들의 아내, 연인, 아들, 딸, 친구, 의사, 경호원, 요리사를 만나 취재해 알려지지 않은 이들의 모습을 독자들에게 내보인다.


빈 라덴과 나지와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지만 빈 라덴은 곧 일부다처제 풍습을 따르기로 한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조차 지나간 풍습으로 여겨지던 일부다처제였지만 ‘좋은 방식’으로 이용하면 이상적 결혼을 할 수 있는 제도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첫 번째는 마치 걸음마를 하는 것과 같고, 두 번째는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아 빠르지만 불안정하다. 세 번째는 세발자전거로 안정적이지만 속도가 느리고, 네 번째에 이르러서야 이상적인 결혼생활을 할 수 있다.”

저자는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생활도 들춘다. 1960년 어두운 극장, 화면 앞에 앉은 18세의 김정일은 한 여배우에게 이끌린다. 평양연극영화대 졸업반에 재학 중인 23세의 성혜림이었다. 성혜림은 영화에서 남한으로 망명한 남편의 아내 역할을 맡아 당에 대한 충성으로 운명과 맞서는 여인을 연기해 신여성의 모델이 됐다.

김정일은 그를 사랑하게 됐지만 성혜림은 이미 결혼해 딸까지 있었다. 수줍은 김정일은 애를 태우다 1969년에야 성혜림과 비밀리에 살림을 차린다. 완벽한 이념을 추구하는 북한에서 성혜림과의 결혼은 불가능했고,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을 설득시킬 수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를 일찍 잃고 결핍 속에 살던 김정일은 자신의 내면을 채워줄 여자가 필요했고, ‘중성동 15호’ 관저로 성혜림을 불러들인다.

행복한 생활을 하던 성혜림의 방해자는 철의 여인이자 권위적인 시누이 김경희였다. 아들 김정남을 두고 떠나라는 김경희의 압력을 견디다 못한 성혜림은 불면증, 신경쇠약증에 시달렸고 김정일은 조선노동당 중앙당의 타자수인 김영숙과 공식적인 결혼을 한다.

성혜림은 치료를 위해 모스크바로 떠났다. 이후 김정일은 고영희, 김옥 등 수많은 기쁨조를 오가며 여성에 대한 편력과 냉소를 동시에 보인다. ‘자신을 버린’ 성혜림에 대한 분노도 함께였다.

책은 이 밖에도 평생 한 명의 여인과 살며 설거지와 화장실 청소까지 도맡아 한 호메이니의 ‘의외의’ 모습, 후세인의 금발 여인 선호 경향, 아내의 영향력 아래 살아간 밀로셰비치의 모습 등을 조명한다. 재미있는 소재인 만큼 쉽게 잘 읽힌다. ‘한 인간의 연애담’을 엿보면서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새 세계 정치사에 대한 이해도 높아져 있다.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