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오키나와.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됐다.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 ‘소나티네’에서 도쿄 야쿠자 보스가 왜 자신의 마지막을 오키나와 바다에서 끝내려 했는지, 드라마 ‘여인의 향기’에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여주인공이 왜 오키나와의 바다를 찾아갔는지를. 쏟아지는 햇살에 따라 실시간으로 색이 바뀌는 푸른 물빛. 그 위로 순간순간 밀려와 미간을 간질이는 미풍. 모든 걱정을 거품으로 만들어 사라지게 할 것 같은 파도 소리. 그 바다 앞에 서니 찌들었던 마음까지 씻겨나갈 것 같다. 그것은 힐링이었다.

◆비극의 섬에서 레저의 섬으로

20만여명. 제2차 세계대전 오키나와 전투 희생자 숫자다. 징용과 종군위안부로 끌려 온 한국인은 1만명. 일본군은 그들에게 막대기 하나 쥐어주고 전장으로 뛰어들라 했단다. 오키나와 최후의 전투가 펼쳐졌던 남부 마부니 언덕 평화기념공원에 서면 쓰라렸던 역사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우리들에게 ‘비극의 섬’으로 더 많이 알려진 오키나와. 현재는 본섬의 20%가 미군이 주둔하는 ‘기지의 섬’. 그런 오키나와가 역사의 상처를 씻고 섬나라 여행의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다. 천혜의 자연풍광에다 연평균 기온이 24도를 웃돌고 겨울에도 18도 아래로 내려가는 날이 많지 않아 골프 요트 다이빙 조정 낚시 등 레저를 즐기기엔 천국이다.

최근에는 스포츠팀들의 전지훈련 장소로도 각광받는다. 오키나와 컨벤션관광뷰로(OCVB) 코디네이터인 아키시는 “한국 프로야구팀 전지훈련과 드라마 및 방송 촬영이 잇따르면서 한국인 관광객들도 많이 늘고 있다”고 했다. 며칠 전에는 한 방송사가 주최한 슈퍼모델 선발대회 본선이 열려 해변에서 수많은 미인을 만날 수 있는 행운을 안겨줬다.

◆스노클링에 푹~ 빠져봐

오키나와는 눈이 즐겁고 몸이 즐거운 섬이다. 섬의 서해안은 바람과 파도가 빚어놓은 해안 풍경이 즐비하다. 석회암 절벽 위에 천연 잔디가 펼쳐진 만자모도 그중 하나. 지명은 ‘사람 1만명이 앉을 수 있다’는 옛말에서 따왔다. 푸른 바다와 녹색의 아름다운 대비가 낯설지 않았다. 어릴 적 물속에서 첨벙첨벙 뛰놀았던 내 고향 서귀포 외돌개와 많이 닮았다.

중부 온나손에 있는 마에다 곶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쿠버다이빙 포인트다. 오키나와의 속살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코발트빛 수면 아래 펼쳐진 산호초 군락들과 노란 파란 열대어를 보며 스노클링을 즐긴다고 잠깐 상상해보라. 경기도 일산에서 왔다는 한 여성 관광객은 “스노클링을 하려고 일부러 휴가내고 왔다”며 “평생 잊을 수 없는 경험”이라고 했다. 이곳 해식동굴인 ‘블루 케이브’의 수면에 닿아 부서지는 햇빛이 장관이다. 그렇게 오키나와의 바다는 특별함이 넘친다.

◆하이브리드 아일랜드

160여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오키나와. 그중 3분의 1 정도에만 사람이 살고 있다. 150여년 전만 해도 중국의 속국이었다가 태평양전쟁 때는 미국의 지배를 받았고, 1972년에 다시 일본 영토로 귀속됐다.

수난이 참 많은 역사이지만 그 비극의 ‘선물’ 덕분에 오키나와에서는 중국과 미국, 일본의 문화가 뒤섞인 독특한 섬나라 문화를 맛볼 수 있다.

중국과 일본 건축양식이 공존하는 옛 류큐왕국의 슈리성.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다. 미군의 중심 주둔지에 위치한 챠탄초의 아메리칸 빌리지는 이국적이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걷다보면 마치 캘리포니아 어느 항구 도시에 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오키나와 젊은 남녀들의 데이트 명소이기도 하다.

음식도 하이브리드다. 오키나와 정통 류큐음식에선 본토의 깔끔한 맛과 중국의 살짝 느끼한 맛이 느껴진다. 대표적 음식인 고야참프르는 ‘부대찌개’처럼 미군의 영향을 받았다. 오키나와의 장수식품으로 유명한 고야(여주)에 스팸을 넣고 볶은 요리다. 오이처럼 길쭉하고 겉은 울퉁불퉁한 고야는 쓴맛이 나는 열대채소인데 고야참프르의 맛은 말로 설명하기엔 뭐하다.

◆포크스테이크 먹어봤니?

일본 혼슈(본섬)와 달리 오키나와 사람들은 중국의 영향으로 돼지고기를 많이 먹는다. 고기를 푹 삶아 기름기를 빼서 먹는 요리가 일반적이지만 퓨전도 많다. 제주도처럼 흑돼지 요리도 있다. 여장을 푼 나하시 프랑스 호텔 ‘머큐어’에서 맛본 흑돼지 안심 포크스테이크는 제주도에서도 먹어보지 못한 새로운 맛이다. 웰던으로 구운 고기에 왕소금을 살짝 얹으니 맛이 환상적이다. 포도송이처럼 알이 주렁주렁 달린 해조류 ‘우미부도(바다포도)’도 함께 먹으면 별미다.

아침 뷔페에도 토속음식들이 유독(?) 많이 나왔다. 왜 그런가하고 호텔 지배인 우메무라에게 물었더니 웃으며 “주방장이 이곳 출신이라서”라고 한다. 생선회는 물론 해산물 철판구이에도 추천 한 표. 미식가들에겐 오키나와 식도락 투어를 꼭 권하고 싶다.

◆어촌마을은 제주도와 닮아

어촌마을은 거의 제주도다. 골목 골목 돌담과 소박한 기와지붕의 집들. 티셔츠 하나 달랑 입거나 가끔 알몸으로 바다에 뛰어드는 까무잡잡한 어린이들. 정말 같은 풍경이다. 일본인 가이드 히로미가 “이곳 아이들은 뜨거운 햇빛을 피해 낮이 아닌 저녁에 주로 수영을 한다”고 말할 땐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바람 많고 돌 많고 여자 많은(?) 것도 제주도와 닮았다. 바람 불고 비가 오고 동시에 햇볕이 나는 변화무쌍한 날씨도 같다. 사투리를 쓰면 본토 사람이 못 알아듣는 것도 그렇다. 하나 더. 놀러왔다가 공기가 좋아서, 풍경이 좋아서 눌러앉아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다른 게 있다면 겨울에 제주도에는 눈이 오고 오키나와에는 오지 않는다는 것뿐. 바다에 떠 있는 맹그로브 숲도 제주도엔 없는 풍경이고….

오키나와 바닷속 생태계가 궁금하다면 츄라우미수족관에 가보자. 길이 10m가 넘는 고래상어 두 마리와 거대한 황다랑어가 함께 유유히 물속을 거닌다. 수조는 세계 최대 규모다. 수조 옆에 레스토랑이 있어 식사를 즐기며 고래상어를 보는 건 색다른 경험이다. 돌고래쇼도 볼 수 있다. 츄라우미수족관은 오키나와 여행 필수코스이기도 하다. 지난달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의 섭지코지 인근에 문을 연 아쿠아플라넷제주는 이 츄라우미수족관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오키나와의 미니 삼청동

번화가는 세계 어느 도시에서나 약간은 뻔하다. 그게 그거 같다. 이럴 땐 뒷골목 탐방이 묘미다. 나하시의 메인스트리트 ‘국제거리’ 뒷골목도 그렇다. 서울의 삼청동처럼 골목이 아기자기하다. 전통 재래시장 뒤편 골목을 따라 돌아다니다 보면 예쁜 옷가게와 카페, 아담한 술집을 만날 수 있다. 드립 아이스커피를 마실 수 있는 카페 ‘Jazzy 98’도 있다. 주인장이 걸그룹 카라를 좋아한다는 재즈마니아다. 정년퇴임하고 취미로 카페를 운영한다고 한다. 그곳에서 재즈를 들으며 신선한 드립 아이스커피를 마시다 보면 방전된 몸이 금세 재충전 되는 기분이다. 카페 벽면에선 50년 전 국제거리 풍경이 담긴 사진도 볼 수 있다.

■ 여행 팁

아시아나항공이 주 7회 운항한다. 도쿄여행 뒤에 가고 싶다면 하네다공항 국제선에서 호주 저비용항공(LCC)인 젯스타(Jetstar)를 이용하면 싸게 갈 수 있다.

비행시간은 서울에서 2시간10분가량. 도쿄에서는 2시간30분이 걸린다. 오키나와 내에서 모노레일로 웬만한 곳은 다 갈 수 있다. 섬이므로 렌터카를 이용해도 편하다.

비치에 있는 특급호텔들은 비수기에 하루 20만원, 성수기엔 70만~80만원대로 비싼 편. 오키나와현의 현청 소재지인 나하 시내에는 아코르호텔 그룹이 운영하는 ‘머큐어’처럼 싸면서 깔끔한 호텔도 있다. 비즈니스 투어와 여성 관광객들에 추천할 만하다. 와이파이는 기본. 아이폰독도 있다. 특급호텔 못지않은 시설에다 여성전용 룸까지 갖췄다. 수신자 부담 예약전화(00798-8521-2018)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전후 놀라운 복구로 ‘기적의 1마일’이라 불리는 나하의 메인스트리트 ‘국제거리’에는 오키나와의 상징 동물인 ‘시사도그’ 인형 등을 파는 기념품 가게가 즐비하다. 전통시장 1층에서 생선을 사서 곧바로 2층에서 회로 먹을 수도 있다. 파인애플공원에 가면 특산품인 파인애플과자와 빵, 오키나와의 조개 소라 전복 껍질 등을 살 수 있다. 모노레일 오모로마치역에 대형 면세점이 있다. 물가는 본토보다 10~20% 싼 편.

오키나와=이철민 기자 press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