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시간에 맞춰 밤 11시부터 새벽 5시까지 매일 배우들과 연습했고,낮에는 돈을 꾸러 다녔습니다. 꼭 독립운동하는 기분이었어요. (웃음) 1997년 뮤지컬 '명성황후'를 보고 뉴욕 사람들이 한국에 호기심을 가졌다면 이번 '영웅'은 그들에게 문화적 충격과 위기감을 안겨줄 겁니다. 보름 전 현지 기자간담회에서도 '테러에 민감한 뉴욕에 테러리스트 이야기를 가져올 생각을 어떻게 했느냐'는 질문이 쏟아졌죠.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안중근도,이토 히로부미도 둘 다 희생자로 그려집니다. 시대가 만들어낸 운명적 만남이었던 거죠."

대한민국 1세대 뮤지컬 연출가인 윤호진 에이콤인터내셔널 대표(63)가 안중근 의거 100주년 기념작 뮤지컬 '영웅'을 들고 세계 공연계의 심장부인 브로드웨이를 다시 찾는다.

공연장은 국내 최초의 브로드웨이 진출작 '명성황후'를 올렸던 곳.최근 개보수를 거쳐 '링컨센터 데이비드 코크'라는 이름으로 재개관한 2550석 규모의 대극장이다.

윤 대표는 이곳에서 트럭 4대를 가득 채운 소품과 40여명의 배우,40여명의 스태프를 이끌고 '유엔의 날'인 23일 '영웅'의 막을 올린다.

▼14년 전 그 자리여서 감회가 새롭겠습니다.

"'명성황후' 공연 때 뉴욕타임스에 리뷰가 실렸는데 깜짝 놀랄 만큼의 호평이었습니다. 그 덕분인지 2주일 내내 날마다 200~300명씩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로 인기를 끌었죠.표를 못 구해 돌아가는 사람까지 있었어요. 대관 과정에서 차갑고 까다롭게 굴던 극장장이 나중엔 눈물을 글썽이면서 '이런 일은 우리 극장 역사상 처음'이라며 '내년에 한 달을 대관해줄 테니 꼭 다시 와달라'고 했죠.그때 이후 '명성황후'는 영국과 캐나다 등을 돌며 16년째 장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겐 각별한 곳이죠."

▼안중근이란 인물이 갖는 의미는.

"안중근 의사가 목숨을 걸고 의거했을 때 고작 서른한 살이었습니다. 지금 30대 초반이면 삶의 목표를 잡느라 방황하고 헤매는 나이잖아요. 정상적으로 교육을 받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나라를 위해 몸과 마음을 통째로 바칠 생각을 했는지 존경스러워요. 그것도 우리나라만을 위한 게 아니라 '동양 평화'를 추구했지요. 그는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의 독립 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참모중장 자격으로 응징했다고 법정에서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일반 살인피고가 아니라 전쟁포로로 취급하라고 했죠.그런 점에서 지정학적으로 늘 외세에 침탈당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인들에게 새로운 사고와 생존 방법을 제시한 인물입니다. "

▼'영웅'을 기획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어느 날 '젊은 안중근'이 제게 찾아왔습니다. 2004년이었으니까 의거 100주년(2009년)을 5년 앞둔 때였지요. 눈빛이 강렬하고 잘생긴 30대 남자가 안중근기념사업회 문화국장이라며 찾아왔습니다. 안 의사 100주기를 기념해 뮤지컬을 만들어 달라기에 거절했어요. '명성황후' 이후에 진이 다 빠진 데다 좀 더 보편적인 러브 스토리를 구상하느라 정신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1주일 뒤 또 찾아와서 '이건 '명성황후'의 후속이다. 안 의사가 일본 법정에 서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15가지 이유를 말했을 때 첫 번째가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힘주어 말하는 거예요. 며칠 동안 그 한마디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

▼그동안 안중근 일대기를 다룬 작품들이 대부분 실패했기 때문에 걱정이 많았을 텐데.

"물론 걱정했지요. 그런데 하얼빈역의 기차 장면만 제대로 만들어내면 뭔가 작품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을 다잡고 기획에 들어갔죠.4년 뒤 구성을 거의 끝낼 무렵 기념사업회에서 99주기 행사에 와달라고 하더군요. 거기 가서 처음 이 기획을 제안한 문화국장을 찾았는데 글쎄 30대 초반인 그가 저를 만난 뒤 1년쯤 지나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다는 거예요. 섬뜩했죠.'안중근 의사의 혼이 그 친구를 통해 내게로 왔나' 싶었습니다. "

▼역사적인 소재로 두 번이나 브로드웨이에 진출했습니다.

"'한국이 물건만 잘 만드는 게 아니라 문화 수준까지 높다'는 인식을 확실히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브로드웨이에 도전하려면 자신감을 갖고 그들이 전혀 흉내낼 수 없는 작품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들도 소재 고갈에 시달리고 있어요. '오페라의 유령' 후속인 '러브 네버 다이즈'는 쏟아지는 혹평에 맥을 못 추고 있고 '스파이더맨'도 그렇습니다. 충격적인 졸작들이죠.그런 중에 동양 이야기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문화적으로 동양의 시대가 온 거죠."

▼관객 반응은 어떨까요.

"브로드웨이 역사상 처음으로 3.5m의 거대한 기차 장면이 나옵니다. 이런 무대장치는 아무나 할 수 없죠.기차가 지나가다 붕 떴다가 어느 순간 사라지는 마법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데 한국 공연예술의 위상을 확인시켜줄 겁니다. 런던의 유명 프로듀서 스티븐 래비는 '영웅'을 보고 '영어 버전이었다면 토니상 전 부문에 노미네이트됐을 것'이라며 흥분했지요. 모두 입을 딱 벌리고 감탄사를 자아낼 날이 왔습니다. "

▼뉴욕 공연의 예상 수익은 어느 정도입니까.

"총 250만달러짜리 프로젝트인데 객석이 꽉 들어차도 14회 공연하면 입장 수입이 150만달러밖에 안 돼요. '영웅' 국내 초연 때 40억원 정도 제작비를 들였는데 공연 끝나고 43억원의 매출을 올렸죠.모두 7억원 정도 흑자를 냈고 그걸 종잣돈 삼아 뉴욕 공연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물론 뉴욕 공연에 필요한 예산 중 10억원 정도가 모자라 빚을 지고 진출하는 것인데,그건 빚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해외에서 공연을 하면 우리 교포들도 보잖아요. "

▼일본 시장 진출은 어디까지 진행됐나요.

"'명성황후' 때부터 계속 문을 두드렸는데 소재 문제가 좀 걸렸죠.그러나 '영웅'은 별 문제가 없을 겁니다. '영웅'을 먼저 선보이고 그 후 '명성황후'를 들고 갈 겁니다. "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