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계 회사에 다니는 김 과장은 얼마 전 구두경고를 받았다. 무심코 사내 자료를 출력해 외부로 유출했다는 이유에서다. 얼마 전 친구가 회사에서 만든 보고서를 받아볼 수 없겠느냐고 청했다. 사내 인트라넷에 올라있는 데다 크게 보안을 요구하는 자료도 아닌 것 같아서 출력을 해서 건넸다. 하지만 아니었다. 프린트할 때 사번이 입력됐다. 승인없이 사내 자료를 유출한 꼴이 됐다.

사내 보안을 강화하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대기업은 물론 중소기업까지 경영전략과 신기술의 정보유출을 막기 위해 다양한 보안책을 도입하고 있다. 사내에서 휴대용 저장장치(USB),노트북,메신저 정보를 보안하는 것은 기본이다. 웹하드에 접속할 때는 임원의 결재를 받도록 하는 회사도 많다. 문서도 저장하자마자 암호화돼 지정된 사용자 외에는 문서를 열어볼 수 없게 돼 있다. 스마트폰 등으로 갈수록 편리해지는 시대에 더욱 강화되는 보안은 때론 김 과장 이 대리들의 짜증을 일으키기도 한다.

◆보안 때문에 연애도 못해

중견기업에 다니는 강준모 대리(31)는 같은 팀에 근무하는 여자 동료와 비밀 연인 사이다. 그들은 회사에 있을 때 틈날 때마다 사내 메신저로 밀회를 즐겼다. 그러던 어느 날 보안업무를 담당하던 인사팀 과장이 강 대리를 불렀다. 그는 강 대리에게 "사내 메신저는 일할 때 쓰는 것"이라며 "연애질하라고 쓰는 게 아니다"라는 경고를 날렸다. 깜짝 놀랄 수밖에.둘만이 메신저로 주고 받았던 내용까지 세세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고 봤더니 둘이 주고받던 메신저가 인사팀이 실시한 무작위 검열에 걸린 것이었다. 강 대리가 다니는 회사는 보안을 위해 직원들의 메신저를 정기적으로 검열하고 있다. 그는 "아무리 회사 메신저라지만 개인적인 내용까지 담긴 메신저까지 검열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사내 메신저 사용만 허용하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이런 규제를 교묘히 피해나가는 직원들도 있다. 대기업에 다니는 손병만 과장(37)은 '듣보잡(듣지도 보지도 못한 잡것)' 메신저를 깔았다. 손 과장은 "MSN 네이트온 미스리 FN과 같은 주요 메신저들은 회사의 서버에서 차단되지만 개인이 개발해 배포하는 유명하지 않은 메신저의 경우 회사에서 일일이 차단하기 어렵다"며 "뛰는 회사 위에 나는 직원들은 항상 있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고맙다,스마트폰"

한 대기업에 근무하는 김모 과장(37)은 평소 주식투자를 통해 재테크에 힘써왔다. 은행예금은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제로금리' 시대에 진입한 지 오래인데 다 적립식 펀드 역시 김 과장에겐 큰 매력이 없어 결혼 전부터 주식 직접투자로 돈을 불려왔다. 김 과장의 투자스타일은 장기투자라기보다는 단기간에 잦은 매매를 통해 고수익을 추구하는 편이다. 그런데 5년 전 회사 측에서 사내 전산 시스템에 대한 보안 강화를 이유로 주식투자 사이트에 대한 접속을 원천적으로 차단해 버렸다. 이때부터 김 과장은 전업 주부인 아내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주식매매를 해왔다. 주로 휴대폰 문자 메시지를 통해 '매매지령'을 전달한다. 김 과장이 '삼성전자 20주 시장가 매도'라고 문자 메시지를 보내면 아내가 홈트레이딩시스템(HTS)을 통해 매매계약을 체결하는 식이다.

이런 김 과장에게 스마트폰은 '구세주'와 같았다. 스마트폰을 통해 주식거래가 가능해지면서 더 이상 번거롭게 아내를 통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종이에 금속물질까지 심어놔

한 대기업 계열사는 보안 강화를 위해 특수 금속 물질이 들어간 특수용지만 사용하도록 하고 있다. 종이에 금속성 센서물질이 포함돼 있기 때문에 서류를 갖고 회사 밖으로 나갈 경우 출구 게이트에서 경고음이 울린다. 이 회사는 오래 전부터 USB나 CD 등에 정보를 담아가는 보안유출을 막기 위해 금속성 물질을 검출할 수 있는 검색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종이는 검출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보고서로 인한 보안 유출이 빈번했다. 이에 회사 측은 금속 물질이 들어간 종이를 마련하는 고육책을 마련했다.

직원들 사이에선 불만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금속성 물질이 들어간 종이는 일반 용지에 비해 가격이 세 배 이상 비싸기 때문이다. 부서마다 할당된 용지가 턱없이 적기 때문에 인쇄할 때마다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이 회사에 근무하는 윤익준 대리(33)는 "예전에는 인쇄한 후에 보고서에 오탈자가 있는지 체크하곤 했다"며 "요새는 아예 인쇄하기 전부터 미리 꼼꼼하게 보고서를 들여다봐야 한다"고 토로했다.

◆특정 사이트는 아예 차단시켜

지난해 대기업에 입사한 김윤미씨(27)는 회사에서 인터넷을 하던 중 특정 언론사의 사이트가 접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처음에는 인터넷 접속에 오류가 있는 것으로만 알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해당 사이트는 열리지 않았다.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됐다. 김씨가 재직 중인 회사에 비판적인 보도를 하던 일부 언론사의 사이트만 열리지 않도록 회사 측에서 조치를 취해 놓았던 것.게다가 특정 용어들의 경우에는 포털사이트에서 검색조차 되지 않았다. 사주(社主)의 이름도 검색이 안 되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무리 해당 언론사가 회사에 비판적이더라도 인터넷 접속까지 막아놓은 건 과민반응 같다"고 지적했다.

◆'철통보안'군대가 따로 없네

인터넷 업체 연구소에 다니는 안현경 대리(28)는 대학시절 '얼짱각도 원론 교수님'이라 불릴 정도로 셀카의 달인이었다. 그의 휴대폰에 들어있던 셀카 사진만 해도 100여장.하지만 이 회사에 입사를 한 이후로는 사진 찍기를 그만뒀다. 매일 아침 회사에 출근할 때마다 휴대폰 카메라에 사내 정보 보안을 위해 스티커를 붙였는지 검사하기 때문이다. 혹여나 주말에 친구들과 셀카놀이를 하다 스티커 붙이는 걸 깜빡하고 출근하는 날엔 보안 직원이 '회사 하루 이틀 다니냐'라는 눈빛으로 자신을 쏘아보며 카메라에 스티커를 붙여준다. 안 대리는 "내가 회사에 들어온 건지 여군에 입대한 건지 모르겠다"며 "가끔은 휴대폰에 카메라가 있는지도 까먹는다"고 말했다.

◆아찔한 보안검색

대기업에 다니는 오문태 대리(35)는 신입사원 시절 어렵게 입사했던 회사에서 잘릴 뻔한 경험이 있다. 기획팀에서 근무하는 오 대리는 회사 매출,순익 전망 및 주요 핵심 기술 등이 담긴 보고서를 작성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다. 어느날 하루일과를 마치고 퇴근하던 무렵.적외선 탐지기로 가방 수색을 하던 한 보안요원이 그를 멈춰세웠다. 오 대리의 가방엔 회사의 핵심기밀이 담긴 보고서가 들어 있었다. 그가 실수로 작성 중이던 보고서를 자신의 가방에 넣고 퇴근해 버린 것이다. 한 달여에 걸친 조사 끝에 그는 의도적인 유출이 아니라는 점은 인정받았지만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등줄기에서 식은 땀이 난다.

이정호/이관우/김동윤/이상은/강유현/강경민 기자 dolp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