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0년 비참한 75세

2030년 1월.나는 이제 75세가 됐다.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돌아가던 서울의 시계 바늘이 멈춰버린 것일까. 30여년 전만 해도 현기증이 날 만큼 속도감 있게 지나가던 서울의 풍경은 이제 전혀 생동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곁눈질도 하지 않고 바삐 제 갈길만 가던 사람들은 자취를 감췄고,젊은이들로 늘 북적대던 명동과 신촌은 한산해진 지 오래다. 모든 것이 느릿느릿 조용히 흘러가는 한국.우리 노인들이 딱 살기 좋은 곳이 됐다. 한때 젊은이들만 드나들던 극장과 커피숍도 우리 또래들의 공간이 됐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다.

"노인 백수 어떡하나"

나 같은 노인은 더 이상 우리 사회의 소수가 아니다. 한국은 이미 4년 전 초고령 사회가 됐다. 노인인구 1180만명 시대,4명 중 1명은 만 65세 이상 노인인 세상이다. 20년 전만 해도 10명 중 1명이 노인이었다. 한국은 정말 빠르게도 늙어왔다. 그러나 늘어난 건 노인뿐이다. 각종 출산장려 정책이 실패하면서 2016년 들어 노인보다 아이들 수가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2019년에는 아예 인구까지 감소하기 시작했다.

다들 '노인 천하'라고 하는데 신기하게도 우리는 여전히 '뒷방 늙은이' 신세다. 다수지만 완벽한 비주류다. 우리는 젊은이들을 고생시키고 국가 경제에 부담을 준다는 얘기를 귀가 따갑도록 듣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2.7명의 젊은이들이 나 한 사람을 부양하기 위해 일을 하고 있다. 30년 전만 해도 10명이 나눠졌던 짐이었다.

게다가 노동력이 부족해지고 소비와 투자까지 위축되면서 잠재성장률도 4.5%에서 1.6%로 떨어졌단다. 정부는 초고령 사회의 부담을 이기지 못해 매년 재정적자를 내고 있다. 연간 GDP(국내총생산) 대비 공적연금과 건강보험 소요 비용이 12%에 이르는 실정이다. 맘 편히 연금을 받을 수도,아플 수도 없다.

나 같은 노인이 서러운 이유는 또 있다. 나 같은 사람을 지칭하는 '노인백수'라는 타이틀 때문이다. 우리나라 노인의 70~80%는 일을 하지 않고 여생을 마친다. 예전에는 은퇴한 노인에겐 어차피 노동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수란 말을 쓰지도 않았지만,이젠 공공연히 백수라는 단어를 붙인다. "예전 노인들에 비해 건강 상태가 좋고 수명도 늘어났으니 국가에만 마냥 기대지 말고 일을 하라"는 암묵적 강요로 들리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가장 일을 하고 싶은 건 나 자신이다. 난 30년 가까이 은행에서 일을 했다. 꽤 유능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퇴직을 하고난 뒤 나를 찾은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노인 취업은 청년 취업보다 훨씬 어렵다. 정부가 재정을 들여 수십만개의 노인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있지만,매년 50만명 가까이 늘어나는 노인인구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특히 베이비 부머인 우리 세대는 더 비참했다. 은행을 떠난 뒤 곧바로 노인취업센터에 이력서를 보냈지만 항상 대기순서 500번 언저리였다. 교수나 의사 같은 전문직 출신 정도가 백화점 문화센터 강의나 방과후 교사라도 맡을 수 있었다. 한때 구청 잡일이라도 할까 했지만 그나마도 '젊은 노인'들 차지였다.

"빈곤의 악순환 벗을 길 없어"

결국 대부분 노인은 취업을 포기하고 나처럼 쥐꼬리만한 연금에 기대어 살 수밖에 없다. 은행에 30년간 다니면서 꼬박꼬박 부어 받는 국민연금과 개인연금 월 200만원이 내 수입의 전부다. 이들 연금 때문에 국가가 지급하는 노령연금은 받을 수가 없다. 예전에는 그럭저럭 살 수 있을 돈이었겠지만,물가가 올라 늘상 빠듯하다. 해외여행은커녕 친척 경조사에라도 한번 가려면 일주일 생활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

은퇴를 할 때까지만 해도 번듯한 집과 상당한 퇴직금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20년 가까이 '실업' 상태에 놓여 있었던 데다 자녀들 결혼과 주택자금 마련에 목돈이 들어가면서 퇴직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자식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마지막 남은 집 한 채로 역모기지론 대출이라도 받아볼까 했지만,그것마저도 포기해야 했다. 10년 전부터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주택 수요가 현저히 줄어든 데다,생활비가 모자라는 노인들이 앞다퉈 매물을 내놓으면서 집값도 폭락해버렸기 때문이다.

20년 전만 해도 목동에 30평대 아파트 한 채를 가지고 있으면 매달 130만원은 받을 수 있었다는데,이제는 100만원도 안된다. 그 돈을 받자고 집을 잡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평생 서울에 아파트 한 채를 갖기 위해 아둥바둥 산 인생이 억울할 뿐이다. 노인의 빈곤율은 이미 50%를 넘어섰다고 한다. 일을 못 하니 늘 가난하고,가난하니 늘 아픈 곳이 많다. 결국 연금과 건강보험 부담이 커진다. 악순환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 짜증나는 악순환을 끊을 힘이 없다.

"젊은이들이 무섭다"

그래도 생활에 쪼들리는 건 그럭저럭 참을 수 있다. 하지만 내 존재가 자신들에게는 무거운 짐이라는 젊은이들의 시선은 정말 견디기 힘들다. 예전처럼 전철에서 노인에게 선뜻 자리를 양보하는 법도,상냥한 미소를 건네는 경우도 별로 없다. 대놓고 적개심을 드러내는 이들도 있다.

이제는 지역감정보다 세대감정이 선거의 향방을 좌우하고 있다. 선거 때마다 각 정당은 젊은이와 노인들의 표심을 잡으려고 더 자극적인 공약들을 쏟아낸다. 개혁성향이 뚜렷한 한 정당은 '세금으로 더 이상 노인 뒤치다꺼리를 하지 말라'는 젊은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노령연금 지급 액수를 줄이고,건강보험 수가를 낮추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처음에는 미안한 마음에 참고 있던 노인들이 발끈해 '노인들의 삶을 책임지라'고 맞선다.

그나마 정치 공방은 양반축에 속한다. 최근 들어 노인을 대상으로 한 테러도 늘고 있다. 밤길에 혼자 귀가하는 노인을 집단 폭행하거나 노인들이 사는 집에 불을 내는 범죄가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힘 없는 노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소름이 끼친다. 이젠 골목에서 떼를 지어 오는 젊은이들만 봐도 공연히 주눅이 든다.

그래도 파고다공원 같은 곳에서 같은 처지의 노인들과 말벗이라도 하면 괜찮았는데,요즘은 아내 때문에 꼼짝없이 집에 갇혀 지낸다. 아내는 지난해부터 치매로 고생하고 있다. 3년 전만 해도 간헐적으로 치매 증상을 보이곤 했는데 지금은 내 얼굴도 알아보지 못한다. 저렴한 비용의 요양센터를 알아봤지만 치매 노인이 120만명에 달해 거동이 불가능한 노인만 받아준다는 대답을 들었다. 불쌍한 아내를 보면 나까지 힘이 빠지고 우울해진다. 나까지 아프면 안되는데….

내 삶은 각종 수치로 재단되고 있지만 누구도 수치 속의 내 삶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빨리 죽어야 할 텐데….10년,20년이 될지 모르지만 여생을 생각하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서보미 기자 bmse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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