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장벽 설치 1주년이 지난 며칠후인 1962년8월17일 찰리검문소
부근에서 장벽건축공사를 하던 18세의 페투루스 페히터라는 소년이 피를
흘리고 죽었다. 그가 죽은 소식이 널리 퍼져 모두가 치를 떨었다. 슬픔과
분노에 찬 사람들의 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서베를린 시의회 의원이었던
빌리 브란트는 시위학생들에게 결연히 외쳤다. "여러분들이 돌파하고자
하는 벽은 여러분의 머리보다 강하다. 폭탄을 이용하여 이 세상에서
이룰수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그때 이미 그의 마음속에서는 동서화해의 길만이 그 벽을 허물어뜨릴수
있다는 신념이 싹트고 있었으리라. 그것은 그가 서독 외무장관과 총리를
지내면서 동방정책(Ostpolitik)으로 구체화된다. 동.서독 분단과
동서대결의 현실을 인정하면서 한걸음씩 화해를 모색해가자는 것이었다.
동.서독총리회담에 이어 소련 폴란드등과 불가침조약을 맺은것이 그것이다.
서독 초대수상이었던 콘라드 아데나워가 이룩해놓은 "라인강의 기적"을
바탕으로 냉전체제에 안주하고 있던 서독을 대서방일변도 외교노선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동서데탕트의 활시위를 당긴 것이다.

그가 91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것이나 오늘날 "독일통일의 아버지"로
추앙받게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역사의 귀결이었다.

지난8일 78세를 일기로 타계할때까지 공인으로서의 그의 생애는
바이츠제커 독일대통령이 감탄했듯이 "20세기 독일의 운명"과 궤도를
같이했다. 반파쇼활동,평화 추구,빈부격차해소에 그의 삶은 바쳐졌다.
스칸디나비아 망명시절의 반나치운동 가담,"이 도시는 평화를 원한다.
그러나 항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전세계에서 베를린보다 더 평화와 휴식과
안정을 원하는 도시는 없다. 그러나 유약해져서는 안된다"고
베를린장벽앞에서 외치던 서베를린시장시절의 의연한 자세,동방정책을
끈질기게 추진하던 외무장관 총리시절의 추진력,74년 총리직을 물러난뒤
국제개발문제독립위원회 의장직등을 맡아 남북문제해결에 동분서주하던
만년.87년 여름 서독 사민당당수직을 물러나면서 행한 연설의 한구절에서
그의 생의 철학은 표출된다.

"나에게 있어 평화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양심과 의견의
자유,빈곤과 공포로부터의 자유다"
이 시대의 위기와 혼돈에 한줄기 빛을 던져줄 브란트와 같은 현자가
없는지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