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의 눈] '싸고 좋은 주식' 잣대 PER·PBR이 흔들린다
"요즘 고 PER(주가수익비율)주는 대부분 과거 밴드 상단을 웃돌고 있어 정상적인 밸류에이션(가치 대비 평가)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PBR(주가순자산비율) 1배에 대한 시장의 신뢰성은 갈수록 약해지고 있다."

국내 증시에서 PER과 PBR은 그간 '싸고 좋은 주식'을 찾아내는데 필요한 밸류에이션 지표로 자리잡았다. 그런데 이들 투자지표가 제대로 이름값을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기업이익의 변동성이 심해진데다 이익 추정치가 주가하락 속도보다 더 빠른 경우까지 생기면서 PER 왜곡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서다. 화폐가치가 떨어지면서 자산주(株)에 대한 평가 잣대 역시 위협받고 있다.

28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현재 코스피200 업종 안에서 PER 20배를 웃도는 종목 비중이 약 23%에 육박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또 유가증권시장 내 시가총액 상위 30개 종목 중 23곳의 PER(12개월 예상 실적 기준)이 1월 말 대비 오른 것으로 집계됐다.

PER은 현재 주가를 1주당 순이익으로 나눈 수치로, 이 수치가 높으면 기업의 수익성에 비해 주식이 높은 수준에서 거래되고 있다는 뜻이다.

일각에선 국내 대형주 가운데 PER 10배 이하의 저평가 주식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토로하고 있다. 실제로 이머징 증시 대비 PER이 2~3배 낮아 매력적이던 국내 증시의 격차는 0.5배 수준으로 확 줄었다. 밸류에이션 부담이 커졌다는 얘기다.

수출주 부진으로 내수주가 각광받고 있지만, 내수주 역시 고PER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아모레퍼시픽, 호텔신라, 한국콜마, 롯데제과 등은 이미 PER 30배 이상으로 뛰어오른 상황이다. 중국인 모멘텀(동력)과 정부의 내수 활성화 정책이 더해져 장밋빛 전망이 쏟아진 결과다.

PBR 1배에 대한 시장의 신뢰성도 도마위에 올랐다. PBR 1배를 밑돈다는 것은 기업이 가진 자산을 다 팔고 사업을 청산했을 때보다 현재의 주가 가치가 낮다는 뜻이다. PBR 1배 미만에선 보유주식을 팔지 말고 사야한다는 게 소위 '투자 정설'로 통한다.

증시전문가들은 따라서 PBR 1배 미만인 종목에 대해선 '사는 구간이지 파는 영역이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여왔다. 하지만 이 지표의 신뢰성이 갈수록 약해지고 있다는 주장이 나와 눈길을 끈다.

박승영 KDB대우증권 투자전략팀 연구위원은 "앞으로 PBR의 밸류에이션 지표로서 영향력은 떨어질 것으로 본다"면서 "먼저 자본이 계속 쌓일 것이라는 시장의 믿음이 약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지금까지 PBR 1배는 단기 매매보다 장기 매매를 위한 척도였는데 기업들이 이익을 꾸준히 내고 자본을 늘려갈 것이란 기대감 때문"이라면서 "하지만 앞으로 기업들이 자본을 쌓기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라고 강조했다. 정부가 초과 유보에 대한 과세 방침을 밝히면서 상장기업들에 투자, 배당, 고용 압력을 높이고 있어서다.

기업이익의 안정성이 훼손되고 있는 점과 자본의 안정성이 낮아지고 있는 점도 문제다.

그는 "지금까지 PBR이 유용한 투자 지표로 쓰인 이유는 기업이익의 변동성이 적었고, 자산의 안정성이 높았기 때문"이라며 "무엇보다 불확실한 업황 상황에서 대응하기 위한 전략 지표로 PBR이 PER보다 신뢰성이 높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고 설명했다.

화폐가치가 떨어지고 있는 점도 이들 지표에 대한 기대감을 낮추는 주범으로 꼽힌다.

장화탁 동부증권 주식전략팀 이코노미스트는 "최경환 경제팀은 화폐가치 하락을 통해 성장동력 확보와 경제활성화를 추진하고 있다"며 "정부의 의지를 엿보면 분명히 화폐가치는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특히 그는 "정부의 공격적인 재정 확대는 통화량공급(물가상승)을 통해 화폐가치 하락으로 연결될 것"이라며 "정부 주도의 자산가격 상승이 본격화될 경우 투자자산 대비 화폐의 상대적인 가치 하락은 가팔라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실질적인 마이너스 국면에서 더 이상 '현금이 왕'일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금성 자산을 지나치게 많이 가진 기업들의 경우 고평가 지적이 나올 수 있다는 게 장 이코노미스트의 주장.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면 주식시장은 자산주에 대한 새로운 평가 잣대를 들이댈 수 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한경닷컴 정현영 기자 jh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