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앞 일번지를 언제부터 드나들었는지 모르겠다. 입학하자마자, 어쩌면 입학식도 치르기 전이었을 테다. 그전부터 이미 예비대학이니 신입생 환영회니 술 마실 일은 많았으니까. 일번지는 치킨집이지만 우리의 안주는 주로 노가리와 번데기, 쥐포 같은 것들이었다. 치킨 냄새를 맡으며 겉바속촉의 노가리를 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일번지에서 맛본 것은 사람에 대한 예의였다
일번지 주인 아저씨는 늘 무심한 얼굴로 생맥주를 담아주거나 치킨을 튀겼다. 손님에게 웃음을 지어야만 친절한 건 아니다. 술 먹다 돈이 부족하면 학생증을 대신 받아주던 곳도, 학교 행사 때 후원금을 받기 위해 늘 첫 번째로 들르는 곳도 일번지였다. 돈도 없는 것들이 자리만 차지하고 앉아서 값싼 안주만 시켜 먹었으니, 늘 붐볐지만 정작 아저씨는 돈을 많이 벌지는 못했을 것 같다.

일번지에는 늘 아는 얼굴이 앉아 있었다. 아마 늘 오는 사람들만 와서 그랬을 테다. 우리는 일번지에서 동아리 뒤풀이를 했고, 학회 뒤풀이를 했고, 공연 연습 뒤풀이를 했고, 집회 뒤풀이를 했다. 그도 아니면 어영부영 학교를 떠돌던 이들이 한 일도 없이 뒤풀이를 했다. 그러고 앉아 있으면 또 아는 얼굴이 와서 자연스레 어울려 앉았다. 먹은 대로 돈을 내지도, n분의 1을 하지도 않았다. 있는 사람이 더 내면 되었고, 없는 사람에게 생맥주 한 잔 못 사줄 이유도 없었다. 제법 술이 돌고 나면 우리는 노래를 불렀다. ‘오늘의 할 일은 내일로 미루고, 내일의 할 일은 하지 않는다. 노나 공부하나 마찬가지다…’
박찬일 산문집 <밥 먹다가, 울컥> / 출처: 웅진지식하우스 블로그
박찬일 산문집 <밥 먹다가, 울컥> / 출처: 웅진지식하우스 블로그
박찬일 셰프의 <밥 먹다가, 울컥>을 읽으면서 내가 떠올린 식당은 일번지였다. 음식에 쌓인 오래된 그리움을 털어놓는 에세이인 이 책은, 막막하던 유학 시절 고추장과 멸치를 챙겨 보내주던, 이제는 만날 수 없는 후배, 친정 간 새댁 대신 봐주기 시작한 가게를 40년째 운영하고 있는 군산 ‘홍집’의 주인 등 어렵고 허기진 시절을 함께 지낸 사람들과의 소설 같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뒤늦은 사춘기이자 인생의 가장 큰 방황기를 맞았던 대학 시절, 철없고 무지했던 내 곁에는 자기 할 일은 미루면서도 타인과 함께 사는 법을 알려준 선배들이 있었다. 공부는 안 했어도 가방에 시집 한 권 넣어 다니며 좋은 시를 읊어주던 친구들이 있었다.

지금의 내가 미약하게나마 타인의 처지를 공감하고 세상일에 관심을 가지고 사람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때 일번지에서 함께 노래 부르던, 남의 일 먼저 챙기느라 사회가 말하는 성공과는 거리가 멀어진 그들 덕분이다.

그때보다 훨씬 분위기 좋은 술집에서 비싼 안주에 술을 마셔도 그때처럼 흥이 나지 않는 건, 술자리의 대화가 할 일을 미루고 공부하지 않고는 닿을 수 없는, 부동산과 주식과 입시와 건강과 노후 같은 것들로 채워졌기 때문일까.

최윤경 어크로스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