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학도 길 걷다 부친 뜻 따라 경영 일선에…효성그룹 기반 다져
기술·품질 중시 세밀경영에 '조대리' 별명도…스판덱스·타이어코드 등 일류로
국내 재계 대표하며 해외와 가교 역할

29일 89세를 일기로 별세한 조석래 효성그룹 명예회장은 생전 한국 중화학공업을 일으킨 주역 중 하나이자 국제관계에도 밝은 '글로벌 경영인'으로 평가된다.

기술과 품질을 중시했던 그는 스판덱스, 타이어코드 등 효성의 대표 제품을 세계 최고 반열에 올렸고, 대표 경제단체인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현 한국경제인협회) 회장을 맡는 등 재계의 '얼굴'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다만 국제통화기금(IMF) 사태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법인세 포탈 등의 혐의로 수사와 재판을 받은 점, 아들들 간 분쟁인 '형제의 난'이 불거진 점 등은 늘그막에 상처로 남았다.

◇ 공부 좋아하던 '학구 청년'…아버지 뜻 따라 경영인으로
1935년 고(故)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의 장남으로 태어난 조석래 명예회장은 애초에는 경영에 큰 뜻이 없는 '학구 청년'이었다고 한다.

조 명예회장은 경기고를 다니다 일본 유학을 떠나 히비야고를 거쳐 와세다대 이공학부를 졸업했다.

이어 미국으로 떠나 일리노이대 공과대학원에서 화공학 석사 학위를 딴 뒤 박사과정을 이어갔다.

애초 대학교수가 돼 학자의 길을 걸으려던 그였지만, 창업주인 부친의 부름을 받고 1966년 귀국해 효성물산에 입사하면서 경영인으로 진로를 바꿨다.

그해 11월에는 효성의 모태인 동양나이론 건설본부장을 맡아 울산공장 건설을 지휘하며 이후 화학섬유 분야 선도 기업으로 성장한 효성의 기반을 닦았다.

이후에도 1973년 동양폴리에스터, 1975년 효성중공업을 연이어 설립하며 사세 확장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한때 공학도였던 조 명예회장은 직접 현장을 둘러보고 세밀한 부분까지 살펴 지시하는 꼼꼼한 업무 스타일로 유명해 '조 대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매사는 완벽한 기초조사와 연구, 그리고 검토를 거쳐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장래를 염두에 둔 입장에서 판단되고 경정돼야 한다.

그러나 일단 결정된 일은 완벽하게 이룰 때까지 과감하게 추진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효성의 업무 추진 방식"(1988년 신입사원 연수 특강)이라는 말에도 이 같은 성품이 뚜렷이 드러난다.

기술과 품질을 중시했던 조 명예회장은 '경제 발전과 기업의 미래는 원천기술 확보를 위한 기술 개발력에 있다'는 철학에 따라 1971년 국내 민간기업 최초로 기술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기술 경영'에 앞장섰다.

심지어 신혼여행지를 동양나이론 기술자들이 나일론 생산기술 교육 연수를 받던 이탈리아 포를리로 택했을 정도로 기술에 대한 조 명예회장의 집념은 유달랐다.

나일론, 폴리에스터 등 합성섬유로 성공한 뒤 1980년대 합성수지인 폴리프로필렌에 도전할 당시에도 주변에서는 기술적 기반이 약하고 경쟁이 심하다는 이유 등으로 만류했으나, 결국 새로운 공법을 찾아내 사업을 크게 성공시킨 일화도 기술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일면을 보여준다.

그의 이런 관심과 노력은 주요 제품이 세계 시장에서 최고 평가를 받는 결과로 이어졌다.

특히 '섬유의 반도체'로 불리는 스판덱스는 조 명예회장이 직접 연구개발을 지시한 사업이다.

당시 미국, 일본 등 일부 선진국만 보유하던 제조 기술을 1990년대 초 독자 개발에 성공했다.

그 결과 효성의 스판덱스 브랜드 '크레오라'는 미국 듀폰의 '라이크라'를 제치고 세계 시장 점유율 1위 브랜드가 됐다.

스판덱스와 더불어 효성의 간판 제품 중 하나인 타이어코드도 품질을 인정받아 1위 점유율을 지키고 있고, 송배전설비와 금융자동화기기 등 다른 제품들도 세계 시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환경친화적이고 강도 높은 섬유소재로 플라스틱을 대체할 미래 소재로 꼽히는 폴리케톤, 강철보다 10배 강력하지만 무게는 4분의 1에 불과한 탄소섬유 등 첨단 신소재 개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중화학공업 성장 이끈 조석래…국제관계도 밝은 '미스터 글로벌'(종합)
◇ 해외인맥 풍부한 '미스터 글로벌'…국내 재계도 대표
조 명예회장은 다독으로 유명한 재계의 대표 학구파였고, 국제관계에도 밝아 민간외교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해외 유학 경험으로 일본어는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했고 영어도 유창했다고 한다.

와세다대 동창인 후쿠다 야스오 전 일본 총리와도 각별한 사이로 알려졌을 만큼 재계의 대표 '일본통'으로 불렸다.

풍부한 국제 인맥을 바탕으로 미국, 일본, 중국 등 주요국 경제인들과 활발히 교류했고, 태평양경제협의회(PBEC), 한미재계회의, 한일경제협회, 한일산업기술협력재단, 한중재계회의 등 재계의 국제 교류단체를 이끌며 주요 교역 상대국과의 가교 역할도 적극 펼쳤다.

2006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당시에는 양국의 반대 여론을 무마하고자 양국 재계 인사들과 미국 행정부·의회의 유력 인사들을 만나고 다니는 등 민간외교의 중심에 섰다.

한일 FTA 추진과 함께 양국 기업 간 공동 비즈니스 확대를 모색하는 등 한일 교류에도 적극적이었다.

대표 경제단체인 전경련에서 1987년부터 2007년까지 20년간 부회장을 지낸 데 이어 2007년부터 2011년까지 회장을 맡아 국내 재계의 '얼굴' 역할도 했다.

기업 입장을 대변하며 정부를 상대로 쓴소리도 가리지 않았다.

전경련 회장 재임 당시에는 "물고기가 연못에서 평화롭게 노닐고 있는데 조약돌을 던지면 사라져버린다.

돈도 같은 성격이어서 상황이 불안하면 투자가 일어나지 않는다"며 기업의 투자 환경 개선을 촉구하기도 했다.

2017년 발간된 조 명예회장의 팔순 기념 기고문집에는 재계의 지인들이 기억하는 그의 일면이 여실히 드러난다.

손길승 SK텔레콤 명예회장은 정부에 적극 의견을 밝히는 조 명예회장을 두고 '재계 지도자'라 칭했고, 허창수 GS그룹 회장은 '미스터 글로벌'이라 불렀다.

중화학공업 성장 이끈 조석래…국제관계도 밝은 '미스터 글로벌'(종합)
대내외 활동은 활발했지만 경영인으로서는 소탈한 인물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해외 출장을 갈 때도 수행원 없이 다녔고,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의전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등 허례허식을 기피하는 성품으로 알려졌다.

일본에 출장을 다닐 당시에는 자동차 대신 전철을 이용했다.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마중 나온 임원들이 가방을 대신 들어주려고 하자 "내 가방은 내가 들 수 있고, 당신들이 할 일은 이 가방에 전략을 가득 채워주는 것"이라고 한 일화도 유명하다.

실무진과 직접 토론하는 시간이 많았고, 부하 직원이라도 전문 지식과 확신을 갖고 이야기하면 받아들이곤 했다.

임원들도 조 명예회장과 생각이 다를 경우 자신의 의견을 적극 건의할 수 있었다고 한다.

◇ '아들들 갈등'에 말년 아픔도
조 명예회장은 한국 경제계에 한 획을 그은 경영인이었으나 여느 기업인이 그렇듯 그림자도 존재했다.

차남인 조현문 전 효성 부사장이 촉발한 경영권 분쟁은 '형제의 난'으로 회자되며 아버지인 조 명예회장과 그룹에 적잖은 상처를 남겼다.

경영권 승계 구도에서 일찍 밀려난 조 전 부사장은 회사 경영에서 손을 떼고 2014년까지 회사 지분을 전량 매각한 뒤 그룹과 관계를 완전히 정리했다.

그러나 조 명예회장으로부터 경영권을 물려받은 형 조현준 회장을 상대로 횡령, 배임 등 의혹을 제기하며 고발을 이어갔다.

조 명예회장 본인도 경영 과정에서 법인세를 포탈하고 자금을 횡령했다는 의혹이 불거져 수사와 재판을 받았다.

다만 IMF 사태 극복 과정에서 계열사 효성물산의 부실자산을 정리하면서 불가피하게 발생한 일이며, 사익을 추구하거나 법인세 포탈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게 조 명예회장의 입장이었다.

이 사건은 2020년 대법원이 법인세 포탈 혐의 일부를 무죄로 보고 파기환송해 재판이 진행 중이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