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은 대중의 밀실, 밀실은 개인의 광장… 한쪽에서만은 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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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기태의 처음 책 이야기
최인훈 장편소설 『광장(廣場)』정향사, 1961년 2월 5일 발행
최인훈 장편소설 『광장(廣場)』정향사, 1961년 2월 5일 발행
이념의 밀실과 광장을 오가며 혼란스러워하는 개인 혹은 대중에게 바치는 작품
작가 최인훈(崔仁勳, 1934~2018)의 장편소설 '광장(廣場)'은 잡지 <새벽>의 1960년 11월호에 실렸다가 1961년 2월에 출판사 정향사(正向社)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작품 발표 당시 작가의 나이는 28세,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고 제2공화국이 들어설 무렵이었다. 작가 최인훈은 고등학생 때 겪었던 6·25전쟁과 그로 인한 민중의 고통을 훗날 의식 있는 청년답게 우려의 시선으로 깊이 들여다보았다.▶▶▶[인물 정보] ‘광장의 자유’를 꿈꾼 작가 최인훈
그런 문제의식을 담아낸 작품이 바로 '광장'이었다. 하지만 모두 200쪽 남짓한 자그마한 책 한 권에 담긴 이 작품이 훗날 우리 현대 문학사(文學史)에 미칠 어마어마한 파장을 작가는 과연 예감했을까. 작품의 대강을 살펴보기 위해 장편소설 '광장' 초판본의 시작과 끝 부분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원문을 그대로 옮김)
1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쉬고 있었다.
중립국(中立國)으로 가는 석방 포로를 실은 인도 선박 타골호(號)는 흰 펭키로 말쑥하게 단장한 3000톤의 선체를 진동시키면서 물체처럼 빼곡히 들어찬 동지나해(東支那海)의 대기를 헤치며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석방 포로 이명준(李明俊)은 옆 얼굴이 놀랍도록 단정한 선장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시선을 옮겨, 왼쪽 창으로 멀리 바다를 내다 보았다. 이 선장실 말고는 마스트 꼭대기에나 오르면 어떨까, 그 밖의 장소로서는 이렇게 완전한 전망을 지배할 수 있는 장소가 또 있을 상 싶지 않았다. 바다는 그 쪽에서 눈부신 빛의 반원(半圓)이었다.
명준은 오른편 창으로 내다보았다. 거기 원반의 나머지 반쪽 위에 아침부터 이 배를 호위하는 전투기처럼 멀어지고 가까워지고 때로 마스트에 와 앉기도 하면서 줄곧 따라오고 있는 두 마리의 갈매기가 마치 맵시 있게 오려내서 팔매질한 나무쪼각인양 좌측방으로 원심성(遠心性) 포물선을 그으며 날고 있었다.
<중략>………………………………………………
그는 돌아서서 다시 마스트를 올려다 보았다.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명준은 바다를 보았다. 그들 두 마리 새는 바다를 향하여 미끄러지듯 강하해 오고 있었다. 푸른 광장. 그녀들이 마음껏 날아 다니는 광장을 명준은 처음 발견했다. 그녀들은 물 속에 가라앉을 듯 탁 스치고 지나가는가 하면, 다시 수면으로 내려오면서 바다와 희롱하고 있는 모양은, 깨끗하고 넓은 잔디 위에서 흰 옷을 입고 뛰어다니는 순결한 처녀들을 연상시켰다. <저기로 가면 그녀들과 또 다시 만날 수 있다> 그는 비로소 안심했다. 부채끝 요(要)점까지 뒷걸음질 친 그는 지금 핑그르 뒤로 돌아 섰다. 거기 또 하나 미지의 푸른 광장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엄청난 배반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3국으로? 그녀들을 버리고 새로운 성격을 선택하기 위하여? 그 더럽혀진 땅에 그녀들을 묻어 놓고, 나 혼자? 실패한 광구를 버리고 새 굴을 뚫는다? 인간은 불굴의 생활욕을 가져야 한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지. 인간에게 중요한 건 한가지 뿐. 인간은 정직해야지. 초라한 내 청춘에 <신>도 <사상>도 주지 않던 <기쁨>을 준 그녀들에게 정직해야지. 거울 속에 비친 그는 활짝 웃고 있었다.
<중략>………………………………………………
이튿날.
타골호는 흰 펭키로 말쑥하게 단장한 3000톤의 선체를 진동시키면서 한 사람의 선객을 잃어버린 채 물체처럼 빼곡히 들어찬 남지나해의 대기를 헤치며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흰 바닷새들의 그림자는 그 주변 바다에도 없고 마스트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마카오에서 떨어진 모양이었다.
- 끝 -
이 작품은 광복과 동시에 남북이 분단됨으로써 본격적으로 조성된 좌우 이념의 분열을 주제로 삼고 있다. 주인공 ‘이명준(李明俊)’은 철학과에 다니는 대학생으로서 어떤 이념이 간직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선택하기 위한 지적(知的) 모험을 결심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는 아버지가 남로당을 추종하여 혼자 월북한 이후 은행가로서 부유한 삶을 누리고 있는 친지의 집에 얹혀 살게 된다. 중산층의 여유와 안일을 누리며 살아가는 그 집 남매와 적당히 얽히고설키는 가운데 아버지의 대남(對南) 활동으로 인해 경찰로부터 혹독한 취조를 받게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관념적 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남북문제가 현실 문제로 다가와 고통을 가하면서 이명준은 남한이 비록 자유가 보장된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정권의 부조리와 사회적 부패상을 목도하면서 일종의 ‘밀실(密室)’이라고 느끼며 개인의 행복에서만 삶의 의미를 찾는 풍조에 대한 비판의 시선을 갖게 된다.
동시에 처음 사랑을 느낀 여인 ‘윤애’와의 사이가 어그러지면서 마침내 모험을 감행하여 참다운 삶의 ‘광장(廣場)’을 찾아 북한으로 간다. 그러나 아버지를 만나 어렵지 않게 노동신문 기자가 되는 등 상류층에 편입하게 되지만 북한에서도 그의 눈에는 사회주의 제도의 견고한 공식에 따른 명령과 복종만이 보일 뿐, 개인이 주체가 되어 꾸려나가는 활기차고 창의적인 삶은 보이지 않는다. 북한에도 진정한 삶의 ‘광장’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스스로 상류의식을 버리고 건설현장 노동자의 삶을 택해 거친 세상에 맞서던 중 부상을 입고 입원한 병원에서 간호 봉사를 위해 방문한 발레리나 ‘은혜’를 만나 새로운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그녀는 해외 순회공연을 이유로 명준의 곁을 떠나고 만다. 이윽고 명준은 자원하여 한창 치열해지고 있던 6·25전쟁에 북한군 장교로 참전하게 되고, 간호장교로 참전한 은혜를 다시 만나게 되지만, 그녀의 뱃속에 자기 아이(딸아이로 추정)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실감하기도 전에 은혜는 폭사(爆死) 당하고 만다. 그리고 이명준 또한 낙동강 전선에서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이처럼 그는 남과 북을 넘나들며 이념의 선택을 시도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진실을 발견하지 못함으로써 일종의 허무주의에 빠진다. 전쟁포로 이명준은 자신이 이념을 수립하는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중립국으로서의 제3세계를 선택하고, 마침내 인도로 향하는 ‘타골호’에 몸을 싣게 된다. 위에 인용한 작품 속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자신의 피붙이를 잉태한 채 전쟁의 희생양이 된 여인 ‘은혜’를 회고하는 장면에서 상징적 의미로서 ‘광장’의 심상(心想)이 바다와 두 마리 갈매기를 통해 제시되고 있다.[1]
대중의 밀실로서의 광장, 그리고 개인의 광장으로서의 밀실을 두루 꿈꾼 작가
2018년 최인훈 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소식을 전하면서 작가의 일대기를 다룬 여러 언론의 추모 기사를 종합해 보면, 작가는 1934년에 두만강변 국경 인근 함경북도 회령(會寧)에서 목재상 집안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2] 해방 후 들어선 공산 정권은 작가 집안을 부르주아지로 몰아세웠고, 위협을 느낀 작가의 가족은 고향을 떠나 함경남도 원산으로 이주한다.원산 시절의 삽화(揷話)가 작품 '회색인'과 '하늘의 다리', '우상의 집' 등에 스며 있다. 원산고등학교 재학 당시 6·25전쟁이 터지면서 작가는 다시 한번 삶의 터전을 떠나 가족과 함께 월남(越南)한다. 1950년 12월 원산항에서 해군함정 LST(Landing Ship Tan; 전차상륙함)를 타고 부산에 내려 피란민 수용소에 잠시 머물다 인척이 있는 전라남도 목포에 정착하게 된다. 이처럼 영원한 실향민이자 유목민이라는 작가 최인훈의 정체성은 시대가 만든 것이었다. 한편, 목포고등학교를 졸업한 최인훈은 1952년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했지만 법학도로서의 생활은 만족스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분단된 조국의 어려운 현실에 대한 고민이 보태지면서 마지막 학기 등록을 포기한다. 1957년 육군에 입대해 6년간 통역 장교로 복무했으며, 대학에 입학한 지 65년 만인 2017년에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에서 후학들을 가르쳤으며, 한국일보 희곡상, 박경리문학상, 동인문학상, 서울시문학상, 이산문학상, 한국연극영화예술상 희곡상, 서울극평가그룹상 등을 받았고, 1999년 보관(寶冠) 문화훈장을 받았으며, 사후(死後)에는 금관(金冠) 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최인훈 선생은 1959년 24세 군인 신분으로 <자유문학>에 단편 '그레이(GREY) 구락부전말기(俱樂部顚末記)'와 '라울전(傳)'이 실리면서 등단했다. 이듬해 월간지 <새벽> 11월호에 문제작 '광장'을 발표함으로써 우리 문단의 대표작가로 떠오른다.
'광장'은 작가가 복무하고 있던 대전 병기창에서 백지에 손으로 쓴 소설이라고 한다. 앞서 살핀 것처럼 주인공 ‘이명준’은 분단 시대를 온몸으로 겪으며 사유하는 상징적 지식인으로, 남과 북 모두에서 체제에 절망하고 사랑에 환멸을 겪는다. 전쟁포로로서 남한도 북한도 아닌 제3국행을 선택하고 배에 오른다. 하지만 결국에는 바다에 스스로 몸을 던짐으로써 ‘밀실’만 있고 ‘광장’은 없는 자본주의도, ‘광장’은 있고 ‘밀실’은 없는 사회주의도 정답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남기며 사라져 간다.
최인훈 선생이 작가로서 문제작 '광장'을 집필한 시기는 4·19 혁명으로 자유와 진보의 흐름이 완연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초판본 서문에서 “저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낍니다”라고 썼는가 하면, 2010년 1월에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4·19의 충격이 내 지적(知的)인 타성(惰性)에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광장’을 탄생시켰다. 여기엔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월남한 피난민이라는 사실도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초판본에 담긴 책의 특징과 책을 만든 사람들
'광장' 초판본은 가로 128mm, 세로 186mm 크기에 양장 제책(製冊)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세로쓰기로 조판된 본문은 전체 215쪽 분량이며, 간기면(刊記面) 뒤에 신간 광고를 싣고 있다. 먼저 재킷을 보면 진한 청녹색 바탕에 글자가 들어가는 부분은 백색의 십자 교차로 모양으로 디자인한 다음 가로를 따라 ‘廣場’이란 책 제목을 붉은색 크레파스 손글씨로 표기했고, 세로 윗부분에는 세로 활자체로 ‘長篇小說’, 아랫부분에는 ‘崔仁勳 作’이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아래쪽 오른편에 출판사 이름 ‘正向社’가 백색으로 새겨져 있다. 재킷을 벗기면 나타나는 양장 앞표지에는 재킷에 적혀 있던 정보들이 검정색 가로 활자체로 표기되어 있으며, 재킷에서와 마찬가지로 책 제목을 좀더 크게 표현하고 있다. 앞표지 다음의 면지(面紙)를 넘기면 역시 크레파스로 책 제목을 쓴 속표지가 등장하고, 속표지를 넘기면 ‘작자(作者)의 말’과 ‘추기(追記)’가 이어진다. 그리고 본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추기’가 끝난 뒷면에 ‘장정(裝幀) 윤석원(尹錫沅)’이란 표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재킷 및 속표지 디자인을 담당한 인물은 당시 구상화가(具象畵家)로 활동하면서 여러 책의 장정을 맡았던 윤석원 화백이었던 모양이다. 작자의 말에서 작가는 “이 이야기가 <새벽>지에 실렸을 때 잡지의 사정 때문에 그중 일부를 할 수 없이 떼어 버리지 않을 수 없어 나로서도 못마땅하였었다. 이번에 그 부분을 완전히 살릴 수 있는 기회를 얻어 200여 매를 보충하여 얘기를 완성할 수 있었음을 기꺼이 여긴다.”라고 하여 처음 발표되었을 때보다 그 내용이 상당 부분 보완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곧 처음 출간된 초판본이 사실은 개정판이 된 셈이었다.한편, 간기면을 보면 상단에 저자 약력이 실려 있는데, ‘함북 회령 출생/서울법대 중퇴/전후문협(戰後文協) 회원’ 등으로 단출하게 적혀 있고, 작품으로는 등단작인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와 '라울전' 이외에 '가면고(假面考)'와 '구월(九月)의 다리아'가 추가되어 있는 정도여서 '광장' 발표 이전에는 이렇다 할 작품활동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판본의 책값은 ‘900환[3]’이었으며, 인쇄일은 ‘단기(檀紀) 4294년 2월 1일’, 발행일은 ‘단기 4294년 2월 5일’로 표기되어 있다. 단기 4294년은 서기(西紀) 1961년이다. 아울러 발행자는 ‘주변원(周釆元)’, 인쇄소는 ‘광명인쇄공사(光明印刷公社)’, 발행처는 ‘정향사(正向社)’, 그리고 총공급처는 ‘한국서적주식회사’로 나타나 있다. 특히 정향사의 등록번호가 ‘230’인 점으로 보아 당시 전국의 출판사 숫자가 별로 많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초판본 발행 이후에도 개작(改作)에 개작을 거듭한 집념의 작가
작가 최인훈이 20대 시절에 발표한 '광장'은 단지 남북의 이념 대립에 대한 고발을 위한 것이었을까. “밀실만 있고 광장은 없는” 남한과 “광장은 있지만 밀실은 없는” 북한 사이에서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가에 대한 질문은 아니었을까. 작품을 시작하기에 앞서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 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 나온다.”라고 쓴 작가의 말이 의미하는 것을 우리는 여전히 곱씹으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남과 북 어디에서도 스스로의 삶과 사랑을 실현하지 못한 이명준의 실패는 결국 우리 현대사의 실패이자 인간 그 자체의 좌절을 상징한다. 이처럼 작가 최인훈의 작품 '광장'을 통해 우리는 현대사의 암울한 현실을 ‘성찰과 사유’의 대상으로 바꿀 수 있었거니와, 작가의 작품에 대한 애착과 집념은 초판본 발행 이후 계속 이어진 개정판 발행에서도 확인된다.
작가 최인훈은 또한 문학적인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도시적 삶과 지식인의 내면에 대한 관심을 작품으로 나타내기 위해 박태원의 소설을 차용한 '소설가 구보씨의 1일'을 썼고, “상상과 무의식의 세계를 오가며 공간과 시간을 가로지르는 에세이적인 문체실험”을 보여준 '회색인', '서유기', '구운몽' 등을 발표했다.
가상(假像) 역사 방식의 독창적인 소설 '태풍'과 '총독의 소리'를 선보였는가 하면, 우리나라 희곡사(戱曲史)의 기념비적인 작품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를 비롯한 일련의 희곡 창작에 몰두하기도 했다. 또, 최인훈 선생이 1994년에 그의 일생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장편소설 '화두'는 해방 직후 북한 체제를 경험하고 좌절한 어느 지식인의 개인사와 거대한 세계사적 흐름이라는 두 가지 시간대를 연결하여 ‘나’에 대한 실존적 의미를 탐구한 또 하나의 대작이다.
여하튼 '광장'은 작가 최인훈에게 ‘대한민국 전후(戰後) 최고·최대의 작가’라는 수식어를 붙여 주었다. 이미 고인이 된 문학평론가 김현(金炫, 1942~1990)은 일찍이 그를 두고 “뿌리 뽑힌 인간이라는 주제를 보편적 인간 조건으로 확대시킨 전후 최대의 작가”라고 상찬(賞讚)했는가 하면, 작가 황석영은 2015년 펴낸 <황석영의 한국 명단편 101>에서 최인훈의 작품 '웃음소리'를 소개하면서 “한국문학의 모더니티가 대중이 확보한 자유의 공간에서 발현된 것이라는 점에서 문학사적으로 의미가 있다. 혁명공간의 시간이 짧았다고 하여도 덧없는 것은 아니었다. 최인훈을 포함해서 그 뒤의 수많은 한글세대 작가들은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까.”라고 평가한 바 있다.
1996년 100쇄를 돌파한 <광장>은 지금도 전국의 서점에서 여러 판본이 공존하면서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2018년 7월 23일, 향년 84세를 일기로 최인훈 선생은 지상에서의 고단했던 일생을 마감하고 하늘의 별이 되었다. 장례는 문학평론가 김병익(金炳益) 선생이 주관하여 대한민국 문학인장(文學人葬)으로 치러졌으며, 경기 고양시 자하연 일산 공원묘원에서 영면(永眠)에 들었다. /김기태 '처음책방' 설립자
[1] 작품 속의 현재적 시간은 ‘타골호’ 안에서의 첫날과 마지막 날 이틀뿐이고, 나머지는 이명준의 회고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2] 공식적인 기록에는 1936년생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당시 출생신고를 늦게 하는 관행에 비추어 볼 때 호적상의 기록이며, 실제로는 1934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3] ‘환(圜)’은 1953년 2월 15일부터 1962년 6월 9일까지 사용되었던 대한민국의 통화(通貨) 단위이다. 1962년에 실시된 화폐 개혁에 따라 ‘원(圓)’으로 대체되었으며, 교환 비율은 10:1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