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우리의 가련한 뜰은 초라해져가고
노랗게 물든 나뭇잎은 바람에 날려간다”

가을의 노래, 톨스토이
조성진은 자제했고, 임윤찬은 과감했다… 차이코프스키의 ‘시월’
최근에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부다페스트 공연 실황이 유튜브에 올라왔는데, 이번 프로그램은 그의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입니다.

임윤찬 - 슈만 피아노 협주곡


예상했던 대로 아주 훌륭한 연주인데, 이날 공연일이 시월의 첫째날이라는 점을 감안했는지 마지막 앙콜곡으로 차이코프스키의 <사계> 가운데 제가 특히 좋아하는 '시월(October, D minor, from TCHAIKOVSKY - The Seasons, Op. 37a)'을 선택했군요.

이전에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암스테르담에서 차이코프스키의 <사계> 전곡을 연주한 공연에서도 특히 '시월' 연주가 좋았습니다.

임윤찬 - 암스테르담


그런데, 이번 부다페스트 연주의 '시월'(위 부다페스트 실황 37:40)은 같은 곡이라도 앙콜곡이라서 그런지 지난 번 암스테르담 연주 때와는 약간 다른 느낌을 자아내는데,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연주하고 있는 임윤찬의 모습을 상상하며 듣고 있노라니 특히 계절의 경계를 지나가는 이 시점에서 다시금 가슴에 고요한 파문이 일어납니다.

사실 이번 공연 장소인 '부다페스트'는 공교롭게도 과거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가 차이코프스키의 <사계>의 일부 곡을 발췌하여 연주했던 곳입니다. 그 때의 실황 녹음이 지금까지도 연주가 애호가들 사이에 상당히 사랑을 받고 있지만, 불행하게도 '시월'은 당시 프로그램에 없었기에 늘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리히터 부다페스트 실황 중 '사계' 발췌


물론 리히터가 대신 다른 러시아 피아니스트 플레트뇨프가 아주 감수성이 풍부한 '사계' 전곡 연주를 한 것이 있어서 애호가들의 갈증을 해소시켜주었지요.

플레트뇨프


그 밖에도 차이코프스키의 '시월'은 (전곡 <사계> 가운데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은 '6월'만큼은 아니더라도) 다른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좋은 녹음을 많이 남긴 곡인데, 그 중에서는 아래 몇 가지 연주가 기억에 남습니다.

랑랑


라흐코프스키


트로프


이 곡은 우리나라 피아니스트들 사이에서도 앙코르곡으로 자주 연주되는데, 요즈음 국내 연주회에서 임윤찬처럼 강한 티켓파워를 과시하고 있는 조성진도 이 곡을 자주 앙콜곡으로 연주하고 있고, 또 임윤찬 직전에 반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을 한 선우예권이나 임동혁 역시 이 곡을 즐겨 연주하는 듯합니다.

조성진


선우예권


임동혁


이 곡은 멜랑코리한 선율을 만들어내는 데에 각별한 재주가 있는 차이코프스키의 천재적 재능이 유감없이 발휘된 명작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선율을 노래해내는 피아니스트의 칸타빌레적인 표현 역량을 가늠해볼 수 있는 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칸타빌레적인 표현을 위해 차이코프스키는 악보에 다양한 아티큘레이션 표시와 다이나믹의 변화 표시를 기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연주자들은 이러한 지시에 아주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다만, 문제는 단지 이러한 악보상의 지시를 기계적으로 그대로 적용한다고 해서 가슴을 울리는 칸타빌레적인 표현이 구현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있습니다. 따라서, 연주자로서는 쉼표의 공간까지 적절히 활용하며 밀고 당기고 또 치고 빠지는 적절한 음악적인 아고긱을 구사하며 자신만의 노래를 만들어내려고 노력합니다. 이 과정에서 연주자의 표현의지가 너무 과하여 악보의 표시를 벗어나 자의적인 루바토를 과하게 섞으면 느끼하고 조야한 표현이 되기 쉽상입니다.
이러한 칸타빌레적인 표현에 있어서 악보와 연주자의 감정 사이의 절묘한 균형감각이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명연주를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이 곡은 음악적으로 A - B - A - 코다 형태로 진행되는데, 우선 A 부분의 악보를 보면 시작부터 아래 파란색 박스 표시와 같은 부분이 눈에 들어옵니다. 여리게(p) 시작하는데, 좀 과장을 보태면 저는 아래 파란색 박스 부분의 첫 음을 듣고 피아니스트가 어떻게 이 곡을 이끌지 예측을 합니다.
조성진은 자제했고, 임윤찬은 과감했다… 차이코프스키의 ‘시월’
이 부분에서 임윤찬의 연주를 다른 연주자들과 비교해보면, 임윤찬은 도입부의 이 첫 파란색 박스 부분의 음을 다른 연주자들보다 강조하여 연주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임윤찬 도입부


도입부는 위의 악보에서와 같이 파란색 밑줄 부분의 선율이 빨간색 밑줄 부분과 같이 다시 한 번 더 반복되는 구조로 진행되는데, 특히 첫 반복되는 부분은 차이코프스키가 악센트를 부기하고 있습니다(위 악보 두번째 박스 부분). 아마도 임윤찬은 이러한 구조를 의식하고 첫 파란색 박스 부분을 악센트를 주어 강조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시작부터 매우 진한 고독의 느낌을 전달합니다.

그리고 위 악보의 두번째 단락을 보면 이 곡의 핵심 동기라고 할 수 있는 상승 음형에 의한 멜로디가 나오는데, 이 부분을 페달을 통해 레가토로 표현하는 피아니스트들이 많지만 이 상승 음형은 레가토가 아니라 한 음 한 음이 테누토로 (충분히 무게감을 가지고) 표현될 필요가 있습니다. (아래 에머리 유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그 논 레가토의 테누토의 느낌을 살려보려고 노력합니다).

에머리 유


또한 여기서는 poco cresc., 즉 점점 더 커지는 느낌으로 연주하라는 지시가 있고 이는 다시 점점 여리게(>)로 연결된 후 (반복되는 악센트와 함께 흐느끼는 듯한 하행 반음계 진행의) dim., 즉 점점 소리가 줄어드는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따라서 이 poco cresc. 부분이 잘 표현되어야 다이나믹스의 굴곡이 살아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아래 랑랑 연주는 테누토의 느낌이 다르지만 점점 커지는 느낌은 잘 살리고 있습니다).

랑랑


그런데 이상하게도 많은 연주자들이 이러한 다이나믹의 변화를 잘 지키지 않는데, 이 부분은 임윤찬 보다는 오히려 선우예권이나 조성진의 연주가 참 인상적이네요. 다만, 선우예권의 경우 강세는 좋은데, 아티큘레이션 관련하여 좀 스타카토에 가까운 표현을 가미하는 것이 특이합니다.

선우예권


그리고 반복되는 악센트와 함께 흐느끼는 듯한 하행 반음계 진행의 dim., 즉 점점 소리가 줄어드는 부분의 감정적 표현은 임동혁이 참 좋습니다.

임동혁


A 부분의 다이나믹스 지시와 관련하여 또 다른 중요한 점은 핵심 동기라고 할 수 있는 상승 음형에 의한 멜로디가 살짝 변형되어 연주되기 시작하는 아래 부분입니다. 즉 아래 악보에서 파란색 밑줄 부분과 같이 차이코프스키는 여기서 (피아노의 오른손이 연주하는) 상승 음형에 의한 동기와 대조를 이루며 따라붙는 피아노의 왼손 부분에 poco piu f, 점점 더 세게(강하게) 연주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부분은 사실 대부분의 피아니스트들이 간과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조성진
조성진은 자제했고, 임윤찬은 과감했다… 차이코프스키의 ‘시월’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차이코프스키가 위의 악보의 둘째단의 박스와 같이 (스타카토가 슬러로 연결된) 포르타토를 통해 외로운 감정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 부분을 대부분의 피아니스트들은 밋밋하게 처리하고 맙니다. 조성진의 경우 이것을 분명 의식하고 있지만 표현을 어느 정도 자제하는 반면 아래 임윤찬은 이것을 거의 스타카토처럼 강조함으로서 듣는 이의 감정선을 건드리는데, 저는 그런 과감한 표현력을 높이 사고 싶습니다.

임윤찬


이렇게 우수에 찬 A 부분이 끝나면 좀 더 밝고 의지가 느껴지는 B 부분이 이어지는데, 그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아래 악보와 같이 경과구의 끝단에서 poco cresc., 즉 점점 다이나믹스가 올라가서 mf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다이나믹스는 마지막에 가서야 점점 여리게(>) 사그러듭니다(아래 악보의 노란색 형광펜 표시 부분 참조).
조성진은 자제했고, 임윤찬은 과감했다… 차이코프스키의 ‘시월’
그리고 여기서도 역시 오른손 피아노와 왼손 피아노가 대화하듯 전개되는데, 이상하게도 대부분의 피아니스트들이 다이나믹스를 mf로 가져가지 않고 여전히 밋밋하게 p로 진행합니다. 더구나 이 노래가 반복되는 부분(위 악보의 빨간색 밑줄 부분)에서는 오히려 많은 연주자들이 다이나믹스를 더 줄여 더욱 여리게 연주하는데, 이것은 차이코프스키가 섬세하게 지시한 악보의 표시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입니다.

조성진


임윤찬의 경우도 오른손 부분은 역시 다이나믹스를 줄입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래에서 보는 것처럼 왼손 파트 부분의 노래를 충분히 mf의 느낌을 살려 이어지는 점점 여리게 부분으로 연결시킵니다.

임윤찬


이렇게 좀 더 의지가 담겨 있는 B 부분이 지나고 다시 A부분이 반복됩니다.

그리고는 코다로 진입하는데, 코다에서는 다이나믹스가 pp로 되어 있고 마지막에는 (매우 이례적으로) pppp로 끝이 납니다. 여기서도 아래와 같이 파란색 밑줄 부분의 선율이 빨간색 밑줄 부분처럼 반복되는 구조인데 마지막에 morendo(스러지듯이)로 이어져서 맨 끝에서는 종지감이 없이 매우 흐리게 끝나버리고 맙니다.
조성진은 자제했고, 임윤찬은 과감했다… 차이코프스키의 ‘시월’
이 부분은 피아니스트의 다이나믹스 표현력을 극한으로 테스트하는 부분인데, 마지막 마디에 붙은 악센트(위 악보의 빨간색 박스 부분)와 pppp에 담긴 지독한 고독과 허무, 그리고 아쉬움에 대한 표현력은 임윤찬과 임동혁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임윤찬의 경우는 이 마지막 감정을 대조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그 이전에 (악보에는 pp로 되어 있음에도) 살짝 다이나믹스를 올리는 점이 특이한데, 임동혁은 서서히 사그러드는 표현이 압권이네요.

임윤찬


임동혁


이상과 같이 임동혁, 선우예권, 조성진, 임윤찬 등 우리나라의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를 통해 차이코프스키의 '시월'의 내용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여러분들은 어떤 피아니스트의 가을노래가 가장 마음에 드시는지 궁금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