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싶은 길] 산책 같은 등산, 등산 같은 산책


imazine(이매진)의 '걷고 싶은 길'이 100회에 이르렀다.

2013년 6월 '코리안 트레일 1신'(Korean Trail 1st Story)을 띄운 지 8년 6개월 만이다.

'길'을 시작한 것은 국내 걷기 열풍에 발맞추어 풍광이 아름답고 걷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길을 소개하기 위함이었다.

한 달에 한 번 걸어서 100번을 채우는 데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건강 부자' '사유의 달인'이 되는 데 걷기 100번은 충분하지 않을 것 같다.

한 달에 두 번 걷는다면 100번 채우는 데 4년 남짓 걸린다.

좀 더 부지런히 걸어야겠다.

인내와 용기를 머리와 가슴으로 배울 수 없고 실천을 통해 단련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걷기도 마음이나 생각이 아닌 몸으로 해야겠다.

묵묵히 걸은 '뚜벅이 8년 반'을 기념하기 위해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소개하기로 했다.

명산 설악의 산책로 같은 등산길, 등산로 같은 산책길 두 곳이다.

외설악에 있는 비룡폭포 코스와 내설악의 수렴동 코스이다.

토왕성폭포 전망대까지 올라가는 비룡폭포 탐방로와 백담사에서 수렴동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수렴동 코스는 난도가 낮으면서 설악산의 불꽃 같은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체력이 약하거나 등산 훈련을 하지 못한 뚜벅이들도 산에 안기고 싶을 때, 산을 품고 싶을 때 걸을 만하다.

[걷고 싶은 길] 산책 같은 등산, 등산 같은 산책
◇ 가을과 겨울, 비와 눈 사이 말 없는 설악
노적봉, 권금성, 울산바위 …. 속초 설악동 소공원에서 만날 수 있는 설악의 장엄한 자태들이다.

소공원에서 비룡폭포를 향해 걷던 날, 아침에 비가 내렸다.

그 며칠 전 설악에 첫눈이 내렸다.

수렴동 코스를 탐방한 날에도 대청봉에 눈이 내렸다.

설악산은 대체로 10월 말에 만산홍엽을 이루며 단풍이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올해는 따뜻한 기온이 지속된 데다 늦여름과 초가을에 비가 자주 내린 탓에 단풍이 짙게 들지 않았다.

고지대에서는 단풍이 들기도 전에 나뭇잎이 갈색으로 변해 떨어지고, 저지대에서는 여전히 싱싱함을 자랑하는 푸르름이 단풍과 어우러졌다.

설악에는 단풍 고운 가을과 갈색 겨울이 함께 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설악은 비와 눈 사이를 넘나들었다.

자연만이 펼칠 수 있는 신비롭고 오묘한 향연이다.

비룡폭포 코스는 소공원에서 시작해 육담폭포∼비룡폭포∼토왕성폭포 전망대로 연결된다.

왕복 거리가 5.6㎞로, 2~3시간이면 충분히 다녀올 수 있다.

소공원에서 약 1.2㎞까지 구간은 유모차나 휠체어로도 이동할 수 있다.

대청봉에서 발원해 소공원을 휘돌아 동해로 흘러드는 쌍천 위에 비룡교가 나 있다.

비룡교 위에 서면 속초와 인제를 잇는 고개인 저항령(1,100m)이 눈에 들어온다.

설악산 주 능선의 일부인 저항령 일대는 멸종위기 야생동물인 산양 서식지이다.

다리를 지나 쌍천을 끼고 폭포로 향했다.

바위의 형상이 달마대사의 얼굴을 닮았다는 달마봉이 눈앞에서 나타났다.

문득 뒤돌아보니 멀리 울산바위가 버티고 있다.

앞에 달마봉, 뒤에 울산바위, 발아래 쌍천…. 눈길 닿는 곳마다 비경 아닌 곳 없다.

비룡폭포는 명승 95호, 토왕성폭포는 명승 96호, 수렴동 계곡은 명승 99호, 울산바위는 명승 100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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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향긋한 흙냄새가 올라온다.

흙냄새의 원인은 탄소, 수소, 산소 등으로 구성된 천연물질인 지오스민이다.

숲은 나무가 내뿜는 또 다른 천연물질인 피톤치드와 흙이 발산하는 지오스민으로 가득했다.

눈은 한 폭의 동양화 같은 경치로, 코는 그윽한 향기로, 귀는 나뭇잎과 계곡물과 새들의 합창으로 채워지니 부러울 게 없는 순간이다.

"설악산을 품은 자, 세상을 가졌다"라고 외친들 누가 아니라고 할 것인가.

어지러운 정보, 지식, 이념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할 때 우리에게 옳은 길을 찾고 선택하게 하는 밑거름은 평소에 누적된 심미적 경험이라고 한다.

자연과 생명을 가까이하는 것은 좋은 취향과 너그러운 심성을 개발하는 데 알맞은 방편이다.

◇ 비룡·육담·토왕성 폭포
육담폭포는 6개의 검푸른 담과 높이 30m 이상의 물줄기로 이루어져 있다.

육담에서 400m 정도 더 올라가면 높이 16m의 비룡폭포를 만난다.

비룡은 설악산 관광 엽서에 단골로 등장한다.

그만큼 아담하고 예쁘다.

육담에서 비룡으로 이어지는 계곡 양쪽은 깎아지른 절벽이다.

비가 많이 올 때 형성되는 간헐 폭포의 흔적이 절벽 면 곳곳에 나 있었다.

관광안내판에 육담과 비룡에 얽힌 전설이 적혀 있다.

옛날 가뭄이 심할 때 마을 사람들이 이 계곡에 사는 용에게 처녀를 제물로 바쳤더니 용이 승천하고 해갈됐다는 내용이다.

자연현상에 대해 인간이 느끼는 두려움을 읽을 수 있는 설화다.

서양 문화의 원류를 형성하는 그리스 신화에는 처녀 제물 대목보다 더 잔혹한 이야기가 많다.

전설은 고유한 가치가 있고, 현대의 잣대로 그 내용을 비판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다만 앞으로는 동시대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사연들로 장소의 의미가 더 풍성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현대인의 정서와 삶의 향기가 전해지는 이야기가 발굴되고, 그것들이 적혀 있는 안내판을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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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룡폭포부터 토왕성폭포 전망대까지는 좀 가파르지만, 데크 계단이 놓여 있어 각자 체력에 맞춰 천천히 올라가면 그다지 힘들지 않다.

전망대에 이르면 아득히 먼 곳에 있는 낭떠러지를 떨어져 내려오는 토왕성폭포를 볼 수 있다.

이 폭포는 상단 150m, 중단 80m, 하단 90m의 3단 연폭으로, 총 길이가 320m에 이른다.

한국에서 가장 긴 폭포, 설악산 3대 폭포, 국립공원 100경 중 하나이다.

1970년 안전사고 우려로 탐방로가 폐쇄돼 일반인은 토왕성폭포를 조망하기 어려웠다.

2015년 비룡폭포에서 끝나던 탐방로를 400m 연장함으로써 45년 만에 토왕성폭포의 위용이 공개됐다.

화채봉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석가봉, 문주봉, 보현봉, 문필봉, 노적봉 등이 병풍처럼 둘러싼 암벽 한가운데로 굽이굽이 흘러 떨어지는 광경은 선경과 다르지 않았다.

비 온 직후에 물줄기는 더 뚜렷해진다.

이 때문에 비 올 때 일부러 전망대를 찾는 탐방객도 있다.

겨울철 얼어붙은 토왕성폭포는 산악인들의 빙벽 훈련장으로 애용된다.

◇ '물의 목걸이' 수렴동 계곡, 그리고 오세암
수렴동 코스는 설악산국립공원사무소 백담분소에서 시작해 백담사∼영시암∼수렴동 대피소로 계속되는 편도 11.2㎞의 쉬운 탐방로이다.

백담분소에서 백담사까지 약 6.5㎞ 구간은 백담사를 오가는 셔틀버스 때문에 걷기가 쾌적하다고 할 수 없다.

백담분소∼백담사 구간을 셔틀버스를 타고 올라간 다음 백담사에서 수렴동 대피소까지 걷는 것을 권한다.

이 구간은 왕복으로 약 10㎞이다.

여력이 허락한다면 이 탐방로 중간에 있는 영시암에서 2.5㎞ 떨어진 오세암까지 갔다 오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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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사 계곡에 가득한 크고 작은 화강암들은 서리나 눈이 내려앉은 듯 하얗게 반짝거렸다.

흰 바위들 때문에 백담(百潭)을 백담(白潭)이겠거니 추측하는 탐방객들도 없지 않다.

'백담'(百潭)은 맑고 깊은 연못이 100개에 이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백담분소∼백담사 구간에서는 차도를 따라 도보용 데크 길을 조성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데크 길이 완성되면 수렴동 코스 걷기가 더 좋아질 것이다.

신라 시대 진덕여왕(647년) 때 자장율사가 창건한 백담사는 많은 고승, 독립운동가, 시인 등이 거쳐 갔다.

만해 한용운 선생이 승려의 길을 걸으며 '불교유신론', '님의 침묵' 등을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전국 3대 적멸보궁인 봉정암, 다섯 살의 신동이 관세음보살을 부르다가 부처가 된 곳이라는 오세암, 17세기 유학자 김창흡이 은거하기를 맹세하고 창건한 영시암 등이 백담사의 부속 암자이다.

수렴동 계곡은 수많은 담과 소,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큰 물길이었다.

'수렴'(水簾)이란 담이 구슬처럼 꿰어 있다는 뜻이다.

'물로 만든 목걸이'. 묵객의 시정이 느껴지는 이름이다.

수렴동 계곡은 외설악의 천불동 계곡과 함께 단풍길로 유명하다.

만해가 '님의 침묵'에서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라고 노래한 대상이었던 '님'은 이 수렴동 단풍 속으로 떠난 것이 아닐까.

탐방로 끝 지점인 대피소에 다다랐다.

대피소에서 6㎞를 더 가면 봉정암이다.

우리는 영시암을 향해 왔던 길을 되짚어 내려왔다.

영시암에 닿으니 오세암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애초 탐방 계획에는 없었지만, 이 갈림길에서 차마 오세암을 들르지 않고 그냥 내려올 수 없었다.

영시암에서 마등령으로 가는 길에 있는 오세암은 조선 세조 때 생육신이었던 김시습이 출가했던 곳이다.

모정을 그리워하는 오누이를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 '오세암'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오세암 가는 길은 가파른 오르막이 두어 번 반복돼 꽤 힘들었다.

가는 길에 마등령의 뾰족뾰족한 바위 봉우리를 멀리서나마 볼 수 있었다.

마등령은 손으로 짚고 기어 올라가야 한다고 말할 만큼 험하기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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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악과 금강을 잇는 비전
설악산의 비경은 섬세한 아름다움이다.

한국 산악미를 대표한다.

설악산은 그러나 바위가 많아 험준하고 높은 곳은 쉽게 오르지 못한다.

설악의 주봉 대청봉(1,708m)은 남한에서 한라산(1,947m), 지리산(1,915m) 다음으로 높다.

북한 금강산(1,638m)보다는 70m 더 높다.

한계령, 미시령, 마등령 등 수많은 고개와 산줄기, 깊은 계곡과 비췻빛 계류, 신록과 단풍이 절경을 이루는 설악산은 1965년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됐다.

천연보호구역은 '특별한 자연현상으로서 역사적ㆍ경관적 또는 학술 가치가 큰 것'에 지정한다.

설악산 전체가 천연기념물이자 문화재라는 뜻이다.

1970년 국립공원이 됐고, 1982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유네스코 생물권보존지역으로 지정됐다.

시계 좋은 날은 대청봉에서 금강산을 맨눈으로 볼 수 있다.

백두대간으로 연결된 설악산과 금강산은 먼 거리가 아니다.

한국은 설악과 금강을 잇는 비전을 구체화할 수 있을까.

북한의 막말과 돌출 행동이 빈번해지면서 남북통일에 부정적인 여론도 싹트는 것 같다.

통일에 부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막대한 통일 비용이다.

통일은 간단히 논할 문제가 아니다.

다만 재정 부담을 이유로 한 통일 반대에는 수긍하고 싶지 않다.

돈이 필요하다면 그 돈을 벌어야겠다는 담대함 정도는 가져야 희망을 걸 수 있는 사회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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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zine'이 100번 걷는 동안 많은 분이 도와주셨다.

길을 안내해주시고 길에 얽힌 역사와 문화 현상을 들려주신 문화관광, 자연생태 해설사들께 감사드린다.

필자가 만난 해설사 선생님들은 전문성 높은 향토 사학자를 방불했고, 자부심 강한 지역 문화 애호가들이셨다.

한해 수백만 명이 탐방하는 설악산 같은 큰 국립공원이 변함없이 청정한 모습을 간직할 수 있도록 애쓰시는 자연환경 지킴이들께도 고마움을 전한다.

'코리안 트레일 100번째 이야기'(Korean Trail 100th Story)는 그 큰 노고에 대한 작은 위안이 되고자 한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1년 12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