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1676~1759)은 중국풍의 관념적인 산수화가 판치던 조선시대에 한국적 미감의 ‘진경산수’ 화풍을 개척한 거목이다. 그의 진경산수화는 ‘주역’의 음양조화 원칙에 입각해 음과 양을 한 화면에 조화시켰다. 그로부터 시작된 ‘진경산수’는 동시대에 활동한 현재 심사정, 관아재 조영석, 원교 이광사 등을 거쳐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으로 이어졌다.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이 간송 전형필(全鎣弼)의 서거 50주기를 맞아 대규모 추모전 ‘진경시대 회화대전’을 오는 13~27일 펼친다. 간송이 수집한 그림 중 겸재의 대표작 ‘풍악내산총람’ ‘금강내산’ ‘청풍계’를 비롯해 화집 ‘관동명승첩’ ‘경교명승첩’에 실린 절정기의 산수화 30여점과 심사정 이광사 강세황 이인문 최북 김홍도 신윤복 김희겸의 작품 2~5점 등 110여점을 전시한다. 조선후기 진경산수의 발전 과정과 미술사적 의미를 입체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기회다.

겸재의 대표작 중 눈길을 끄는 것은 ‘청풍계’. 서울 청운동 인왕산 동쪽 기슭의 자태를 묘사한 이 작품은 겸재가 64세에 그린 수작이다. 송곳처럼 뾰쪽하게 솟은 산맥은 북방계의 강한 필묘로, 수림이 우거진 토산은 부드러운 남방계의 묵묘로 처리해 극단적인 음양 대비를 보여준다. 육산이 골산을 감싸는 음양조화의 우주관이 잘 드러나 있다.

겸재가 72세에 내외금강산 진경 21폭을 그린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의 일부 작품도 주목된다. 친일파 송병준의 집에서 아궁이 속으로 사라지기 직전 간송의 눈에 띄어 살아난 것.

금강연봉의 절경을 섬세한 필치로 그린 ‘금강내산’ 또한 명작이다. 험준한 바위를 도끼로 찍어내리듯 그어 절벽을 묘사한 부벽찰법, 백색 암벽들을 음화처럼 장쾌하게 표현한 묵찰법, 암괴의 육중한 질감을 포착해 덧칠한 찰법 등 겸재 특유의 필치를 확인할 수 있다. 가을철 금강산 풍경을 함께 살펴본다는 뜻의 ‘풍악내산총람’도 감상할 수 있다.

겸재, 관아재와 더불어 조선후기의 ‘사인삼재(士人三齋)’로 불렸던 현재 심사정의 남종화풍 그림도 만날 수 있다. 동양화의 준법이 동원된 ‘주유관폭(舟遊觀瀑)’은 조선 회화사에서 보기 드문 수작으로 꼽힌다. 배를 타고 폭포를 구경하는 모습을 그렸다. 산 정상 부분은 피마준(물결치는 필선)으로 부드럽게 처리하고 중봉은 도끼로 찍은 듯한 부벽준으로 강조하면서 변화를 준 게 흥미롭다.

원나라 황공망의 그림을 바탕으로 산속 초가 정자를 그린 ‘계산모정’과 외금강 삼일포, 금강산 만폭동을 그린 작품도 걸린다.

단원의 금강산 그림도 여러 점 나온다. 44세 때 작업한 ‘명경대’와 정조의 지시로 구룡연, 환선정, 마하연 등을 사생한 작품에서 단원의 또 다른 화법을 맛볼 수 있다.

이 밖에 절벽 아래 소나무를 묘사한 신윤복의 ‘송정아회(松亭雅會)’, 육각형의 돌기둥을 동해와 대비시킨 이인문의 ‘총석정’, 버들가지에 앉아 노래하는 꾀꼬리를 잡아낸 김득신의 ‘세류황사’ 등이 나온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은 “이번 전시는 재산과 젊음을 바쳐 일본으로 유출되는 우리 문화재를 보호한 간송 선생을 추모하는 동시에 조선후기 진경산수 대가들의 전모를 보여주고 회화사의 흐름을 짚어보는 값진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관람료는 없다. (02)762-0442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