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가 26일 `주유소 나눠먹기' 담합 의혹이 있는 4개 정유사를 강력 제재키로 한 것은 정유사 간 주유소 확보 자유경쟁을 통해 석유제품의 소비자 가격 인하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

공정위는 그동안 SK, GS칼텍스, S-Oil, 현대오일뱅크 등 4개 정유사가 불공정거래행위를 해왔다는 혐의를 포착하고 조사를 실시, 정유사들이 주유소 확보를 위해 원적관리 등 `주유소 나눠먹기'를 담합했다고 결론내렸다.

공정위는 이를 토대로 25일 전원회의를 열어 4개 정유사에 대해 4천348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고 담합 가담 정도가 심한 SK(SK이노베이션), GS칼텍스, 현대오일뱅크 등 3개사는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기로 했다.

이 같은 과징금 규모는 지난 2009년 12월 공정위가 6개 액화천연가스(LPG) 회사의 판매가격담합 의혹에 대해 부과한 6천689억원에 이어 역대 2번째다.

공정위는 그동안 석유제품이 국민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휘발유, 경유, 중유 등 경질유 석유제품의 83%(2009년 판매량 기준)가 주유소를 통해 최종 소비자에게 유통되고 있는 점 등을 감안해 `엄중 제재' 방침을 밝혀왔다

◇원적 담합 어떻게 이뤄졌나

원적관리란 정유사들이 자기 계열 주유소 또는 과거 자기 계열주유소였던 상표없는 무폴 주유소에 대해 기득권을 서로 인정해 경쟁사의 동의없이 타사 원적주유소를 임의로 유치하지 않는 영업관행을 말한다.

마치 프로스포츠의 자유계약선수(자영 주유소)가 구단을 이적하려 하더라도 종전 구단(원적사)의 동의가 없으면 이적을 제한하기로 한 것과 유사한 것이다.

공정위는 1990년대 중반까지 정유사들은 치열하게 주유소 확보경쟁을 벌였으나 이후 석유수입사의 시장진입, 복수상표표시제 도입 등으로 경쟁환경이 급변하면서 경쟁으로 인한 손실방지 필요성에 대해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밝혔다.

공정위에 따르면 정유4사 소매영업팀장들은 지난 2000년 3월 `석유제품 유통질서 확립 대책반' 모임에서 원적관리 원칙에 따라 원적사의 기득권을 인정하고 타사 원적 주유소 확보 경쟁을 제한하기로 합의했다.

당시 정유사들은 다른 정유사가 원적사의 동의없이 주유소를 유치하는 경우 이에 맞서 `대응유치'를 수용하도록 합의하다.

또 정유사와 계약관계를 종료한 상표가 없는 무폴 주유소에 대해서도 기득권을 인정해 통상 3년간 타사 상표로 변경하지 못하도록 했다.

SKㆍGSㆍ현대오일뱅크의 경우 지난 2001년 9월 복수상표표시제도가 도입돼 주유소 유치경쟁이 촉발될 위험이 발생하자 계열주유소가 복수상표 신청할 경우 디브랜드 등의 방식으로 이 제도의 정착을 방해하기도 했다고 공정위는 전했다.

디브랜드란 주유소에 부착된 상표를 정유사가 철거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또 정유사들은 합의를 실행하기 위해 ▲타사 원적주유소 거래거절 ▲주유소 협의교환 ▲대응유치 협의ㆍ양해 및 정산 등의 수단을 동원하기도 했다.

즉 정유사 상호간 협의가 이뤄지기 전에는 타사 원적주유소에 폴 사인 설치를 거절(또는 유보)하고 나아가 원적사의 포기각서 등을 요구했다.

또 정유사의 지역 지사장 또는 영업사원들이 접촉, 전국에서 20여건 이상 각사 원적주유소를 협의교환하기도 했다.

심지어 불가피하게 타사 주유소 유치 등이 발생할 경우엔 접촉을 통해 `대응유치를 협의ㆍ양해'하고 서로 주고받은 것으로 정산을 하기도 했다.

◇담합, 어떤 결과 초래했나

정유사들의 주유소 나눠먹기 담합은 석유제품의 가격상승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게 공정위의 판단이다.

공정위는 주유소의 거래처 이전이 제한돼 정유사들의 기존 주유소 상표 변경이 미미했으며 폴 점유율이 10년이상 안정적으로 유지됐다고 주장했다.

공정위에 따르면 지난 2000년과 2010년의 정유사의 시장점유율을 보면 SK는 36.0%에서 35.3%로 0.7%포인트 줄어들었고, GS는 26.5%에서 26.8%로 0.3% 포인트 늘었다.

현대오일뱅크는 20.9%에서 18.7%로 2.2% 포인트 줄어든 반면 S-Oil은 13.2%에서 14.7%로 1.5%포인트 증가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큰 변화가 없었다.

주유소 확보경쟁이 제한되면서 석유제품의 주유소 공급가격 인하를 억제해 결국 소비자 가격 인하도 억제됐다고 공정위는 주장했다.

원적관리 담합이 없었다면 정유사들이 주유소 확보를 위해 더 싸게 기름을 공급했을 것이며, 결국 최종 소비자 가격 하락으로 연결됐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과징금 얼마씩 부과됐나

이런 내용을 토대로 공정위는 4개 정유사에 대해 원적관리 담합 및 정보교환 금지를 명령하고 총 4천348억8천8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키로 결정했다.

업체별로는 ▲SK 1천379억7천500만원(SK㈜ 512억9천900만원, SK이노베이션 789억5천300만원, SK에너지 77억2천300만원) ▲GS칼텍스 1천772억4천600만원 ▲현대오일뱅크 744억1천700만원 ▲S-Oil 452억4천900만원 등이다.

신영선 공정위 시장감시국장은 "과징금은 정유사들의 전체 매출액이 아니라 주유소 나눠먹기 담합을 통한 매출액을 기준으로 부과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공정위 조사과정에 일각에선 과징금의 규모가 최대 1조원에 달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돌아 `솜방망이 제재'가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선 "과징금 1조원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반박했다.

공정위측은 또 이번 조사를 벌인 심사관이 총 6천120억원의 과징금 부과를 요구했으나 전원회의에서 4천348억원으로 삭감한 데 대해 "최종적으로 제재수위를 결정하는 것은 전원회의의 고유 권한"이라고 부연했다.

또 최종적으로 각 정유사가 납부해야 할 과징금 액수는 부과액과 다소 차이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공정위는 법에 따라 자진신고한 업체의 경우 과징금을 최대 100%까지 면제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공정위는 지난 2009년 판매가격을 담합한 6개 LPG업체에 대해 6천689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으나 일부 업체가 과징금 면제를 받아 실제 납부된 과징금은 4천94억원에 불과했다.

이와 관련, 신영선 국장은 "자진신고 여부 및 어떤 업체가 얼마만큼의 면제를 받게 될 지에 대해선 확인해줄 수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업계에선 GS칼텍스가 공정위의 조사활동에 적극 협조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제재 의미와 파장

공정위는 이번 건은 그간 소문이 무성하던 정유업계의 원적관리 영업관행 배후에 일종의 불가침 협정과 같은 합의가 있었음을 입증함으로써 담합행위를 적발한 사례라고 밝혔다.

이어 공정위는 "이번 조치는 정유사들이 원적관리 담합을 통해 주유소 확보경쟁을 제한한 행위를 엄중 제재함으로써 정유사-주유소 간 수직계열화 구조를 깼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주유소 확보경쟁이 활발히 이뤄질 경우 정유사의 주유소에 대한 공급가격이 인하돼 최종 소비자 가격도 하락할 것으로 기대된다는 게 공정위 설명이다.

그러나 정유사들은 공정위의 이같은 방침에 대해 강력 반발하고 있다.

공정위가 담합의 의미를 광범위하게 적용해 과도하게 제재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정유업계는 담합을 입증할 구체적인 증거가 없는데도 공정위가 특정 업체 전직 영업사원의 일방적 진술만을 근거로 강력한 제재를 결정했다고 반박하고 있다.

일부 정유사는 공정위의 결정을 수용할 수 없으며 법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밝히고 있어 향후 치열한 법리논쟁을 예고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김병수 기자 bingso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