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은 오후 1시22분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사 현관에 들어선 뒤 이인규 대검 중수부장과 약 10분간 접견을 갖고 1120호 특별조사실로 올라갔다. 조사는 이때부터 약 10시간 계속됐다. 노 전 대통령은 600만달러와 12억5000만원 등 그동안 제기된 모든 의혹에 대해 부인으로 일관했다. 노 전 대통령은 또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과의 대질신문을 끝내 거부했다. 검찰은 이에 대해 "혐의를 부인하는 피의자에 대한 통상적 절차대로 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아쉽다"고 밝혔다. 이날 조사는 밤 11시20분께 끝났으며 노 전 대통령은 이후 2시간가량 조서를 꼼꼼히 읽어보고 서명날인했다. 검찰은 1일 조사 내용을 검토한 뒤 재소환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면목이 없다" 재차 밝혀

노 전 대통령과 이 중수부장의 접견에서는 최고급 녹차인'우전녹차'가 제공됐다. 이 중수부장은 먼저 "먼 길을 오시느라고 고생이 많았다"고 운을 뗀 뒤 소환조사의 불가피성을 설명했다. 이에 노 전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면목이 없다"고 말했다. 봉하마을에서 밝힌 심경과 같은 취지의 대답이다.

노 전 대통령은 또 "검찰의 사명감과 정의감을 이해한다"면서도 "다만 조사과정에서 서로간의 입장을 존중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 중수부장은 "이 수사를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고,조사시간이 많지 않으니 진실이 밝혀지도록 잘 협조해 주길 바란다"고 요청했다. 노 전 대통령은 "알겠다"고 화답했다. 홍만표 수사기획관은 "장시간 버스로 이동한 탓에 지치고 만감이 교차하는 착잡한 표정이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어 노 전 대통령은 오후 1시45분께 1120호 특별조사실로 발길을 옮겼다. 1120호는 노 전 대통령의 형 건평씨가 조사를 받았던 곳으로 VIP들의 무덤으로 불리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조사책임자인 우병우 중수1과장과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조사실에 마련된 소파에 앉았다. 또 담담하게 우 과장 등과 이야기를 나누며 담배 한 개비를 피웠다. 우 과장은 "상의를 벗고 편안히 조사에 임해 달라"고 정중하게 노 전 대통령에게 요구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였고 문재인 변호사,우 과장과 배석한 김형욱 검사 등 5명은 모두 상의를 벗고 조사석에 앉았다.

◆박연차 얼굴만 보고 대질은 거부

노 전 대통령은 이후 조사 과정에서 "아니다" "몰랐다" "기억이 없다" 등 단답형 대답을 구사하거나 때로는 길게 설명하면서 시종 방어적 자세를 취했다. 검찰은 첫 번째로 박 회장이 노 전 대통령 측에 건넨 모든 돈과 대통령 직무와의 전반적인 관련성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우 과장과 김 검사는 "헌법상 명시된 대통령의 지위 · 권한 · 업무에 비춰볼 때 600만달러 등이 결국 노 전 대통령을 보고 건너간 포괄적 뇌물이 아닌가"라고 물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돈에 대해 사전에 몰랐다"고 일관되게 답변했다. 문 변호사는 노 전 대통령의 뒤 벽면에 붙어 있는 책상에 앉아 노 전 대통령의 진술을 도왔다.

조사실 옆에서는 다른 검사 1명이 조사 상황을 모니터링하면서 조사과정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는 이 중수부장의 지시를 수사팀에 전달했다. 직무 관련성에 대한 조사는 오후 4시께 끝났으며 노 전 대통령 측은 10분가량 휴식을 취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 전 대통령은 이때에도 문 변호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담배를 피운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휴식이 끝난 후 두 번째로 100만달러 부분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우 과장 외 새로 투입된 이주형 검사는 100만달러를 사전에 요구했다는 박 회장의 진술이 사실인지 등에 대해 집중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아니다" "맞다" "기억이 없다" 등 단답형으로 짧게 응수했다. 홍 기획관은 "노 전 대통령이'기억이 없다'라고 대답한 부분에 있어서 (허위진술 여부는)조사를 모두 끝내고 전후사정을 따져 판단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노 전 대통령은 직무관련성 · 100만달러 부분에 대한 조사가 끝난 뒤 6시30분께 조사실 옆 대기실에서 측근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메뉴는 인근 모 한식집에서 배달한 '특'사이즈 곰탕과 계란프라이였다. 노 전 대통령은 식사를 마친 뒤 7시40분까지 휴식을 취하고 다시 조사에 임했다. 500만달러 부분 조사에는 이선봉 검사가 투입됐으며 노 전 대통령 측에서는 전해철 변호사가 나섰다.

검찰은 용처가 불분명했던 100만달러와 달리 500만달러에 대해서는 그간 조사를 토대로 다양한 미공개 자료를 들이밀며 노 전 대통령을 몰아붙였다. 노 전 대통령은 이에 적잖이 당황한 기색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홍 기획관은 "노 전 대통령이 자료를 매우 꼼꼼히 살펴보고 아들 건호씨와 조카사위 연철호씨 등의 진술을 모두 다 읽은 뒤 답변했다"고 말했다. 500만달러에 대한 조사를 11시께 마친 뒤 검찰은 박 회장과 대질 카드를 꺼내들었다. 그러나 박 회장과의 대질은 결국 불발됐다. 노 전 대통령 측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에 어긋나고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노 전 대통령은 1일 오전 2시를 넘겨 대검 청사를 나온후 취재진의 질문을 뒤로 한 채 버스에 올랐다. 검찰은 이날 수사에 대해 "순조로웠다"며 노 전 대통령의 혐의 입증을 자신했다.

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