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에게 CB인수권 부여했지만 실권"

삼성특검 1심 재판 결과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재판부가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 편법 발행' 의혹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는 점이다.

그동안 시민단체들이 경영승계를 위한 편법행위라고 문제를 제기했던 쟁점에 대해 '합법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삼성은 이로써 10년 넘게 발목을 잡혀왔던 편법 경영승계 논란에서 벗어날 수 있을 전망이다.

에버랜드 CB논란은 1996년 삼성에버랜드가 발행한 CB가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 등 이건희 전 회장의 네 자녀에게 낮은 가격에 양도되면서 시작됐다. 당시 삼성에버랜드 이사회는 기존 주주배정 방식으로 발행한 125만주의 CB를 삼성물산 등 기존 주주들이 인수하지 않기로 하자 이 전무 등에게 주당 7700원에 넘겼다. 이 전무는 이 CB를 주식으로 전환,삼성그룹 순환출자 구조의 정점에 있는 에버랜드의 최대 주주(현재 지분율 25.1%)가 됐다.

이와 관련,시민단체들은 기존 주주들이 CB 인수권을 실권하는 과정에 이 전 회장과 그룹 비서실이 개입했다고 주장해왔다. 에버랜드 주주인 삼성물산,제일모직 등이 주주배정 방식으로 발행된 CB 인수권을 실권하게 해 이 전무 등이 CB를 매입할 수 있도록 주도했다는 것.

조준웅 특별검사팀도 "이 전 회장과 그룹 비서실이 이 전무에게 경영권을 편법 승계하기 위해 3자 배정을 주도했고,결과적으로 에버랜드에 손해를 끼쳤다"며 이 전 회장 등을 배임 혐의로 기소했다.

법원은 그러나 당시 정황으로 볼 때 에버랜드CB는 '주주 배정' 방식으로 발행됐다고 봐야 한다고 판시했다.

의도적으로 3자 배정을 한 게 아니라 삼성물산 등 기존 주주 계열사들에 CB를 인수할 기회를 줬지만 주주 계열사들이 스스로 실권했다는 얘기다. 그룹 비서실의 지시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낮은 가격에 CB를 인수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것은 주주 계열사들의 책임이지 이 전 회장 등의 배임행위는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결과적으로 재판부는 "당시 에버랜드 이사회 의결은 합법적으로 이뤄졌고 주주 계열사들이 실권한 것은 자율적인 판단이며,그룹 비서실에서 사안을 보고받기는 했지만 헐값 발행을 지시하지는 않았다"는 삼성 측 입장을 받아들였다.

이번 판결로 삼성은 에버랜드 CB 발행에서 비롯된 '편법 경영권 승계' 논란에서 벗어날 수 있을 전망이다. 무죄 판결로 이 전무가 보유한 에버랜드 지분을 처분해야 하거나 그룹 지배구조를 전면 손질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2∼3년 뒤로 예상되는 이 전무의 경영권 승계 과정도 한층 탄력을 받을 것으로 관측된다.

하지만 이 전 회장이 "특검 수사 과정에서 불거진 문제점을 앞으로 개선하겠다"고 밝힌 만큼 삼성은 지난 4월22일 경영쇄신안에서 약속했던 순환출자 구조 해소,지주회사 전환 등 지배구조 개선작업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이태명 기자 chihir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