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14일 숨가쁜 하루를 보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오전 9시30분 서울공항에 도착했다. 해외순방을 마치고 8일만에 귀국한 노 대통령에게는 '이 총리 거취문제 결정'이라는 쉽지않은 과제가 놓여 있었다. 노 대통령은 총리 문제의 심각성을 의식해서인지 12시간30분 간의 긴 비행으로 쌓인 여독이 채 풀리지도 않은 상태에서 잇단 면담 일정을 소화하며 최종 결정을 향한 수순을 밟았다. 특별기에서 내린 노 대통령은 곧장 헬기에 몸을 싣고 청와대로 이동했다. 오전 10시, 이 총리 및 청와대 수석.보좌관들과의 귀국 인사를 겸한 면담이 계획돼 있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예정보다 조금 빠른 9시40분께 청와대에 도착했다. 면담 장소인 청와대 관저에서는 이 총리를 비롯한 청와대 수석.보좌관들이 노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이 총리는 국무회의를 서둘러 끝내고 청와대로 올라온 상태였다. 잠시 옷을 갈아입고 나온 노 대통령은 곧바로 이 총리 및 청와대 수석.보좌관들과 티 타임을 가졌다. 오전 9시40분이 조금 넘은 시간부터 1시간 가량 대화는 계속됐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는 총리 문제가 거론되지 않았다. 주로 노 대통령이 아프리카 3개국을 순방하면서 받은 인상과 느낌 등이 화제에 올랐을 뿐이라는게 참석자들의 설명이다. 이 같은 티타임이 끝날 무렵인 오전 10시30분께 이 총리는 노 대통령에게 "별도로 뵙고 말씀을 드리고 싶다"고 요청했으며, 이후 노 대통령과 이 총리의 별도 면담이 이뤄졌다. 이 자리에는 청와대 이병완(李炳浣) 비서실장과 문재인(文在寅) 민정수석이 배석했으며, 최대의 정국 현안인 '3.1절 골프 파문'을 비롯한 총리의 거취 문제가 집중 논의됐다. 이 총리는 "부주의한 처신으로 누를 끼쳐 다시한번 죄송하다"는 사과와 함께 노 대통령에게 공식으로 사의를 밝혔으며, 당시 참모들로부터 종합적인 보고를 받지 못했던 노 대통령은 답변을 유보했다. 20여분만에 이 총리와의 별도 면담을 마친 노 대통령은 관저에서 간단히 점심 식사를 한 뒤 이 총리의 거취문제를 판단하기 위한 보고 청취 등 비공식 일정을 이어갔다. 이날 오후의 첫번째 일정은 이병완 비서실장으로부터 종합적인 보고를 듣는 것이었다. 보고는 '3.1절 골프' 관련 각종 의혹에 대한 사실관계 및 여론 동향 등이었다. 김만수(金晩洙) 청와대 대변인은 "신중치 못한 골프라는 것 외에 제기된 여러 의혹에 대해서는 특별한 정황이나 문제점이 밝혀진 것이 없다는 내용으로 보고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청와대 참모들로부터 다양한 의혹에 대한 사실관계를 전해들은 노 대통령은 이번에는 당 의견 수렴에 나섰다. 오후 3시께 열린우리당 정동영(鄭東泳) 의장을 만난 것이다. 예고없이 이뤄진 노 대통령과 정 의장의 비공개 면담은 2시간 정도 청와대 관저에서 이뤄졌으며, 이 자리에는 이병완 비서실장만이 배석하는 등 고도의 보안이 유지됐다. 이 자리에서 정 의장은 당을 대표해 "당의 의견과 여론을 종합할 때 이 총리의 사퇴는 불가피하다"는 의견을 개진했고, 노 대통령은 "당의 뜻을 존중하겠다"며 '총리 사의 수용' 의사를 밝혔다. 이날 오전 '유보'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대통령이 심사숙고의 시간을 가질 것"이라는게 관측이 지배적이었으나, 노 대통령은 대변인의 유보 입장 발표가 있은지 불과 4시간만에 '사의 수용'의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이후 노 대통령은 이병완 실장을 따로 불러 "관계기관은 신속하고 철저한 조사를 통해 의혹을 명백히 밝혀주기를 바란다"는 당부를 전달하는 것으로, 무거운 과제를 일단락지었다. 마지막 남은 순서는 노 대통령의 '사의 수용' 결정을 공개하는 것이었다. 이는 오후 5시10분 열린우리당 우상호(禹相虎) 대변인과 김만수 청와대 대변인의 동시 발표로 이뤄졌으나, 당쪽이 조금 빨랐다. 결국 '총리 면담 → 사실관계 등 종합보고 → 당 의견 수렴 → 총리 거취 최종결정 → 사후조치 → 언론 공개' 등 일련의 과정이 노 대통령 귀국 후 일사천리로 이뤄진 셈이다. '질질 끈다'는 인상을 줘왔던 평소의 인사스타일과는 달리 이번에는 '속전속결식' 결정을 했다는 점에서 노 대통령이 귀국 전에 이미 마음을 굳힌 것 아니냐는 관측을 낳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김범현 기자 kbeom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