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장은 입법, 행정, 사법 삼권분립이 확립된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법부를 대표한다. 대법관이 아닌 법관의 임명권을 갖고 있고 대법원 일반 사무를 관장하면서 대법원의 직원과 각급 법원의 사법행정사무를 지휘, 감독하는 등 법원 업무에 대해 전권을 행사한다. 이런 사법 행정 권한 외에 대법원장은 사법 파동의 진원지가 됐던 대법관의 임명제청권을 행사할 수 있고, 최근 위상이 높아진 헌법재판소 재판관 후보 3명에 대한 추천권도 있다 이외에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국가인권위원회, 부패방지위원회 위원 3명에 대한 지명, 추천권고 갖고 있다. 헌재를 제외한 위원회 위원 지명, 추천권은 입법, 행정부에 대한 견제 장치라고 볼 수 있지만 참여정부 들어 막강해진 국가인권위와 부패방지위의 권한을 감안하면 대법원장의 권한 역시 상대적으로 크게 강화된 셈이다. 이런 강력한 권한 때문에 일각에서는 법관들이 선거로 대법원장을 직접 뽑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선거가 혼탁해질 우려와 삼권분립의 취지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아 실현되지는 못했다. 대법원장은 또 재판장의 자격으로 사회적 파장이 크거나 법적 중요성이 큰 사건을 심리하는 전원합의체 재판에 참여한다. 그러나 이런 눈에 보이는 권한보다 대법원장이라는 자리는 사법부의 수장이라는 상징적 의미 때문에 각급 법원 판사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 사법부가 `행정부의 시녀'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은 대법원장으로 상징되는 사법부가 재판 과정에서 권력의 눈치를 보는 데 급급했다는 시선 때문이다. 대법원장이 권력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에는 `사법살인',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까지 공공연히 나올 정도로 법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갔다. 법의 공평무사함을 지키려는 법관 개개인의 양심과 노력에 못지않게 법관들을 이끌고 사법부를 대표하는 대법원장의 위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윤관 전 대법원장이 취임했던 1993년부터는 대법원장이 은둔 아닌 은둔을 하는 게 관행처럼 돼버렸다. 특별한 외부 행사가 없으면 점심 식사는 구내식당에서 집무실로 배달시켜 해결했다. 박철언씨가 최근 회고록에서 1981년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지시로 대법원장 후보`면접시험'을 봤다고 밝혔듯 김영삼 정부 집권 뒤 군사정권의 정치 외풍을 경험한 법관들 사이에서 차라리 외부와 거리를 두는 게 낫다고 여긴 게 은둔 아닌 은둔이 자리잡게 된 배경이라는 게 법조계의 평가다. 역대 대법원장 중에는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려고 권력과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운 인물도 있다. 초대 대법원장을 맡아 9년3개월동안 재임한 김병로 전 대법원장은 반민특위 해체를 비판하고, 사사오입 개헌의 불법성을 역설하면서 보안법 개악에 반대하는 등 이승만 정권의 반민주적 행태에 사법부 수장으로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동성동본 결혼 허용과 간통죄 폐지 등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주장을 펼치기도 해 보수적인 사법부가 균형을 잃지 않도록 이끌었다는 평가와 존경을 받았다. 사법부 수장이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과 정치 외풍에 시달리는 모습을 당대에는 쉽게 구분하기 어렵더라도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에는 선명하게 그 차이가 드러난다는 점을 잘 보여준 것이다. (서울=연합뉴스) 이광철 기자 minor@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