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9년 10월 중국 산둥성 옌타이자동차 부품 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것을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췄던 김우중 회장.당시만 해도 그가 5년8개월이나 해외를 떠돌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후 5년 넘게 이어진 김 회장의 '피곤했던 해외 유랑'은 떠날 당시의 상황 만큼이나 철저히 베일에 가려 있었다. 인터폴의 국제 적색수배(인터폴 5단계 수배유형 중 가장 강한 단계)를 받고 있는 '도망자의 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적인 공인(公人)인 김 회장의 행보가 전혀 노출되지 않을 수는 없는 일.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된 그의 해외 도피 생활은 프랑스 홍콩 알제리 미국 베트남 태국 이탈리아 수단 모로코 등지로까지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주로 현지 교민들에 의해 모습이 목격되곤 했다. 지난 2002년 말에는 경찰청이 "김 회장이 그동안 홍콩을 최소 14차례 드나들고 미국과 유럽 아프리카 등지를 1~4주일 단위로 계속 옮겨다니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최근 들어서는 지난 4월9일 저녁 베트남 남부 호찌민시의 까라벨호텔 로비에서 교민들과 한국 기업인들에게 목격됐으며 지금은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 머물면서 귀국시 형사처벌 수위와 재산 반납 정도 등을 조율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져 국내외의 비상한 관심을 끌기도 했다. 김 회장의 지난 5년8개월간의 해외 유랑은 치료 요양 수술로 이어지는 '의료 여행'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법률 자문을 맡았던 석진강 변호사는 김 회장을 '돌아다니는 종합병원'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해외 도피 전에 이미 위암 수술과 뇌경색 수술을 받은 김 회장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인근 병원에서 심장 수술을 받았으며 최근 들어서는 위암 수술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해졌다. 특히 위 절제로 인해 장이 막히는 장폐색증이 찾아와 대여섯 차례 병원에 실려갔다는 게 측근들의 전언.김 회장은 현재도 장협착증세와 혈압뇌경막하혈증을 앓고 있다. 석 변호사는 "만약 김 회장이 보석 신청을 위해 진단서를 끊는다면 두꺼운 책을 한 권 묶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 회장은 피곤한 도피생활을 하면서도 베트남 하노이의 신도시 개발 프로젝트를 주도하는 한편 프랑스 한 엔지니어링 업체의 고문으로 활동하는 등 '세계경영'의 끈을 놓지 않았다. 특히 지난 1996년께 김 회장의 제안으로 시작된 하노이 개발 사업의 경우 대우그룹의 몰락으로 한동안 표류하며 베트남 현지 건설업체들과 외국 업체들이 사업권에 눈독을 들이기도 했지만 김 회장의 물밑 노력으로 현재 코리아 컨소시엄이 베트남 당국과 양해각서를 체결,본격적인 사업 준비에 나선 상태다. 코리아 컨소시엄은 대우건설 포스코건설 등 6개 업체로 구성돼 있다. 2003년 김 회장을 인터뷰한 미국 경제 월간지 포천은 "김 회장이 한 프랑스 엔지니어링 회사의 고문으로 일하면서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다"며 "그는 자서전을 쓰고 있고 처음으로 골프를 시작했으며 소니 노트북 PC로 게임을 즐긴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김 회장은 5년8개월간 '잊혀질 만 하면' 국내외 언론에 등장하며 이목을 끌었지만 공식적으로 언론을 접촉한 것은 세 차례에 불과하다. 가장 먼저 자신의 심경을 밝힌 것은 2001년 10월.김 회장은 당시 법률자문이던 석진강 변호사를 통해 '대우패망비사'를 연재한 한국경제신문 취재팀에 편지를 보내왔다. 김 회장은 편지에서 국민에 대한 사과와 함께 자신과 대우가 일방적으로 매도당하는 데 대한 비통함도 숨기지 않았다. 인터뷰를 한 건 두 차례에 불과했다. 첫 번째는 2002년 말 태국 방콕 인근에서 당시 문화일보 객원기자였던 도올 김용옥씨와 가진 인터뷰로,김 회장은 "대우는 죽었어도 대우의 정신은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듬해 1월에는 포천지와의 인터뷰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잠시 (외국에) 나가 있으라고 말했다"고 밝혀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유창재 기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