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1백년 전, 그러니까 20세기 초반으로 돌리면 미쓰비시상사를 빼놓고 동북아를 말할 수 없다. 메이지 유신과 세이난 전쟁(서남전쟁:친왕파와 쇼균파가 벌인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태어난 미쓰비시였다. 마키하라 미노루 미쓰비시상사 회장은 자연스러운 권위가 몸에 밴 70대 원로였다. 양복보다는 전통의 까만 하오리가 더욱 어울릴 만한… 그의 직함을 한 번쯤 보아둘 만하겠다. 리플우드 홀딩스 이사, 아얄라 코퍼레이션 이사, 신세이 이사, 밀리아 홀딩스 이사,알리안츠 그룹 국제고문, 글로리아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 고문, 뉴욕증권거래소 아태 자문위원, 다임러크라이슬러 의장위원회 위원, 코카콜라 국제고문단 위원 등의 직함이 그의 이력서를 채우고 있다. 한국인에게서는 보기 힘든 막강한 명함. 그의 이력서에는 '벤'이라는 영어 이름도 적혀 있다. 1930년 런던에서 출생한 그를 '일본'의 원로 상사맨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그는 국제 무역의 대원칙과 개방 경제의 준칙들, 그리고 아시아지역 경제에 관해, 말을 옮기면 바로 문장이 되는 정제된 언어로 설명해 나갔다. 국제무역에 관한 하나의 교과서. 그래서 반론이 쉽지 않은…. "이미 세계적으로 1백50개의 FTA가 발효되고 있어요. 일본도 한국도 늦었다고 하겠지요"라고 그는 말을 시작했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관심은 WTO였습니다. 지금은 그것이 FTA로 옮아 왔어요." 여기까지는 우리가 익히 아는 그대로다. 이 노(老)국제신사의 다음 말이 궁금해졌다. 그는 지금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일본은 아시아의 일원입니다. 일본으로서는 한국과의 FTA가 가장 중요해요('가장'이라는 말에 악센트가 들어간다). 한국과 협정이 체결되면 다른 나라와는 쉽게 갈 수 있습니다. '높은 수준'의 FTA가 되는 거지요. 그러나 역조 문제도 크고…. 물론 간단치는 않습니다." 그가 '수준'이라고 하는 것은 소위 무역의 자유화율을 말하는 것이다. WTO 24조는 자유화율이 90%를 넘어야 비로소 FTA로 간주하고 있다. 하루 전 기자가 만났던 고지마 일본경제신문 전무가 언급한 FTA가 지정학상의 정치문제라면 마키하라 회장의 FTA는 말 그대로 시장의 문제로 변해 있다. "문제는 어떻게 기브 앤드 테이크(give-and-take)할 것이냐 하는 질문이겠지요." 그는 기브 앤드 테이크라는 말은 영어로 했다. "기브 앤드 테이크?" 이미 일본의 관세는 제로수준으로 낮아져 있는 터다. 관세 철폐를 골격으로 하는 FTA에서 우리가 얻을 것이 없지 않은가 말이다. 벌써부터 기자의 입이 근질거렸다. 그의 말을 자르고 들어갔다. "한국이 얻을 것은 무엇일까요. 업자들이 업종별로 상품별로 담합하고 있는 일본시장을 뚫기는 너무도 어렵지 않을까요?" 노신사로부터 부드러운 대답을 내심 기다렸다. 노력해 보겠다든가 연구해 보겠다든가…. 그러나 오산이었다. 마키하라 회장은 표정의 변화도 없이 강하게 반발해 왔다. "한국분들은 없는 장벽을 장벽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식품 유통구조는 매우 복잡했습니다. 그러나 10년 전 이야기지요. 지금은 전혀 다릅니다." 아차 싶었다. 마키하라 회장은 바로 그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한 두 번 들어본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투. 사실이 그랬다. 일본을 방문했던 한국의 대통령에서부터 무역협상에 나선 공무원들까지 모두가 다만 건성으로 따질 뿐이었다는 말도 된다.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실제로 한ㆍ일 FTA 협상에서도 기업인들은 빠져있고 공무원들만이 자리를 채우고 있다는 말이 나돌았던 터다. 그러니 실상은 모른 채 추상적인 역조론만 펴고 돌아왔던 것이다. 일본에 와서 세게 얻어맞은게 벌써 두 번째가 됐다. 정규재 < 부국장 jkj@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