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이 거대 야당으로부터탄핵을 당한 3월12일 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도로에서는 탄핵소추안 가결을 생방송으로 지켜본시민들이 합세해 정치권의 당리당략에 몰두하는 구태와 무책임을 비난하는 1만여개의 촛불을 밝혔다. 촛불 집회를 주도한 탄핵무효 범국민행동측의 추산 결과, 이날부터 27일 마지막집회까지 참가한 인원은 전국적으로 150만명. 20일에는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경찰 추산 13만명의 시민이 모인 것을 비롯해전국적으로 100만명의 시민들이 참가, 탄핵 정국의 어둠을 걷어내려는 촛불 집회를열어 `촛불의 바다'는 절정에 달했다. ◆ `자발적 참여' 늘어 =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은 대통령 탄핵이 이뤄지기지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 설마하는 마음으로 정치권을 지켜보다 `가만히 앉아 있을수 없다'는 생각으로 참가하게 됐다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탄핵 당일 오전부터 여의도 앞에는 `노사모'와 `국민의 힘' 등 친노단체가 주도한 집회가 열렸지만, 탄핵안 가결 이후 집회 주도권은 일반 시민들에게로 넘어갔다. 집회 참가 시민들 중에는 "대통령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야당의 탄핵은 분명히잘못된 것"이라고 정치적 견해를 분명히 밝히는 모습도 눈에 많이 띄었다. 탄핵 다음날부터 광화문에서 시작된 촛불 집회에는 자녀들을 데리고 나온 가족과 연인, 친구들의 모습도 쉽게 찾아 볼 수 있었고, 1987년 민주화 항쟁을 주도했던`넥타이 부대'도 다시 나왔다. 집회 현장 곳곳의 시민들은 `탄핵무효' `국회해산'이라고 적힌 '레드카드'를 들고 질서 정연하게 주장을 전개했다.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하던 날 국회 앞에서 50대 남자가 분신하고 이튿날에는 국회 안으로 차량 돌진 사고가 빚어지기도 했지만 보름 넘게 전국에서 진행된 촛불 집회는 큰 불상사 없이 평화롭게 이뤄졌다. 이들은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 인터넷 등으로 연락을 주고 받으며, 광화문으로모임 장소를 정하기도 하는 등 새로운 집회 문화를 보여줬다. 집회가 사흘째로 접어들면서 정치적 논란이 일자 주최측은 문화행사로 집회 방식을 바꾸기도 했다. 탄핵 사태가 지난 뒤 첫 월요일인 15일 광화문 4거리에만 3천500여명(경찰 추산)이 모였다가 20일과 21일 절정에 달한 뒤 이후 참가자 수가 1천명 이하로 줄긴 했지만 이미 탄핵을 주도했던 거대 야당은 `탄핵 후폭풍'에 시달려야 했다. ◆ `정부 비판' 시민단체 발빠른 대응 = 시민단체들은 탄핵소추안 가결을 `민주와 반민주' `상식과 몰상식'의 대결로 규정하고, 노 대통령에 대한 지지 여부를 떠나 당리당략에 몰두한 거대 야당의 `국회 쿠데타'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민주노총 등 정부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했던 단체를 포함, 551개 시민사회단체는 탄핵 이튿날 서울 YMCA 강당에서 비상시국회의를 열고 `탄핵무효 부패 정치 척결을 위한 범국민행동' 결성에 합의하는 등 발빠르게 대처했다. 한총련은 물론 전국 23개대 비운동권 총학생회장단도 탄핵반대 운동에 동참한데 이어 진보적 입장의 일부대 교수들도 잇따라 성명을 내고 `탄핵소추 결정 철회'를 주장했다. 그러나 보수단체를 중심으로 촛불집회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제기되면서 `맞불집회' 등 자칫 충돌까지 우려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해 이를 걱정하는 여론도 적지않았다. 경찰은 역시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자칫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촛불 집회 장소를 제한했고, 검찰은 집회 주도자에 대해 체포영장까지 청구하는등 강한 처벌 의지를 밝혀 논란이 일기도 했다. 국민행동은 27일 촛불집회가 탄핵무효에 대한 국민적 의지를 충분히 드러냈다고판단, 집회를 중단키로 했다. 탄핵정국 속에서 보름 넘게 진행된 촛불집회는 민주주의, 시민참여, 집회와 시위에 대한 여러 가지 다양한 목소리들을 쏟아내면서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됐다. (서울=연합뉴스) 이광철기자 gcmoo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