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첫 자유무역협정(FTA) 대상국인 칠레 의회가 지지부진한 우리측의 협정안 비준 처리에 대한 항의 표시로 FTA 법안 최종 표결을 한 달 이상 연기했다. 18일 외교통상부에 따르면 칠레 상원은 당초 이번주중 한ㆍ칠레 FTA 법안을 표결에 부칠 예정이었지만 한국 국회에서 이 법안이 계속 표류하자 이같은 보류 방침을 정했다. 칠레에서는 협정 비준안이 지난달 26일 하원에서 통과됐고 상원에서도 이달 중으로 문제 없이 확정될 것으로 예상됐었다. 이와 관련, 안드레스 살디바르 칠레 상원의장은 칠레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에게 한ㆍ칠레 FTA가 그렇게 시급한 과제는 아니다"라며 "이 법안이 양국 국회에서 같이 비준돼야지 한쪽에서만 비준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한국 국회에서 한ㆍ칠레 FTA 처리에 대한 진전이 없는 이상 칠레의 국회 비준도 무기한 연기될 수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 '한국의 자업자득' 비판 칠레 상원의 이번 조치는 한국 스스로의 '자업자득'이라는 지적이다. 칠레측과 오랜 협상 끝에 FTA 합의를 도출해 놓고도 농민단체 등 이익집단의 반발을 이유로 국회 비준 자체를 장기 표류상태로 방치, '한국은 믿을 수 없는 나라'라는 국제적 불신과 '통상 망신'을 자초했음이 확인된 것. 칠레측의 이번 조치는 특히 세계무역기구(WTO) 도하개발아젠다(DDA) 협상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미국 일본 등 선진국들이 FTA 등 양자(兩者) 협상을 통한 지역주의 확대에 나선 시점에 나온 것이어서 더욱 충격적이다. 아직껏 단 한건의 FTA도 발효시키지 못한 한국이 스스로 판 '국제 미아'의 구덩이에 깊숙이 빠져들고 있음을 보여준 셈이다. 지금까지 WTO에 보고된 FTA 발효 건수는 모두 1백84개에 달하지만 이 중 한국은 한 건도 참여하지 못한 상태다. 세계 교역규모 10위권 국가의 위상과 어긋나는 최악의 성적표다. 지금까지 한 건의 FTA도 발효시키지 못한 나라는 1백48개 WTO 회원국중 한국 몽골 등 6개국에 불과하다. ◆ 한ㆍ칠레 FTA 표류, 부작용 속출 통상 전문가들은 한ㆍ칠레 FTA 표류는 경제적 손실보다 대외 공신력 하락이라는 부작용이 더 크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정인교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선임연구위원은 "비준 연기는 칠레와의 외교관계 악화는 물론 한국의 대외신인도 하락을 불러올 수 있다"며 "정부 차원의 정치적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정부는 지난달 대외경제장관회의를 열고 향후 1∼2년내 일본 싱가포르와 FTA 협정을 추진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FTA 로드맵'을 발표했지만 한ㆍ칠레 FTA 국회비준이 차일피일 미뤄지는 상황에서 제대로 이행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이정호 기자 dolp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