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자금과의 전쟁 ] 일본 도쿄 중심가 아카사카에서 남서쪽 언덕길을 20분 정도 걸어가면 47년 역사를 지닌 집권 자민당의 중앙당사가 나타난다. 그리고 외벽에 '자민당 행정개혁추진본부'란 커다란 플랭카드가 눈에 띤다. 이 곳이 바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정치생명을 걸고 펼치는 정치부패와의 전쟁터이다. 그는 지난 3월 행정개혁본부에서 금권정치의 온상이었던 계보의원(정책담당 의원)과 관료 간의 접촉을 제한하는 개혁안을 발표했다. '자민당을 붕괴시키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지난해 9월 총재직에 올라선 고이즈미 총리는 '철의 트라이앵글'로 불리는 '정(政).관(官).재계'에 메스를 가하는 가히 '혁명적'인 대수술에 착수한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지금 달라지지 않으면 무너진다"고 강조했다. 글로벌 스탠더드의 씨앗이 '정치=3류'임을 자인하는 일본에도 마침내 뿌려지고 있는 것이다. "고이즈미의 이런 결단에는 10년 이상 지속된 장기불황이 촉매제 역할을 했다. 경기침체가 이어지면서 경제계는 물론 정치권도 제역할을 해내야 일본에 미래가 있다는 여론을 감안한 결정이었다"고 정치평론가 요시다 신이치는 지적한다. 투명한 정치를 요구하는 기업들의 목소리도 정치자금 개혁에 일조를 하고 있다. 불황이 계속되면서 기업들은 관행처럼 제공해 왔던 정치헌금에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다. 게다가 파벌보스와의 밀실거래는 뇌물스캔들로 이어지면서 재계의 이미지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일본의 정치가 경제에 큰 짐이 되어 왔다면 싱가포르는 정치가 국가경쟁력의 원천이다. '엘리트 중의 엘리트는 곧 정치인'이란 공식이 적용되는게 싱가포르다. 정치는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산소'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원들의 사명감은 거의 신앙에 가깝다. 지난 76년부터 20년간 의원을 지낸 라오택순(劉德順) 변호사는 "싱가포르 의원들은 지금도 '정치지도자의 부패는 국가를 망하게 한다'는 리콴유 전 총리의 말을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있다"고 전했다. 싱가포르 정부가 경제회복을 위해 올 1월로 예정된 총선거를 2개월 앞당겨 지난해 11월에 실시했던게 그 예다. 집권 인민행동당(PAP) 앙몽승(洪茂誠) 의원은 "고촉통(吳作棟) 총리는 경제가 사상 처음 마이너스 성장에 빠져들자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선 총선을 조기에 실시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삼성전자 동남아총괄본부장인 김인수 전무도 "경제논리가 정치논리에 우선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 예"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싱가포르 정치권이 경제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현실적' 이유도 있다. 정치인 장관을 비롯 모든 공무원의 월급봉투 두께가 경제(GDP)성장률에 연동되기 때문.난양공대(南洋工大.NTU)의 박동현 경제학 교수는 "싱가포르 정부는 철저히 경제성적으로 국민들의 평가를 받는다"면서 "작년의 경우 GDP가 마이너스 성장에 머물러 모든 공무원들의 임금이 동결됐다"고 말했다. 정치권의 '경제우선' 마인드가 선진국을 만드는 사례는 싱가포르뿐만은 아니다. 네덜란드에선 재계가 정부 및 의회와 머리를 맞대고 기업관련 정책을 숙의한다. 재계의 목소리를 건성으로만 듣고 흘려버리는 우리 정치권과는 전혀 딴판인 것이다. 도쿄.싱가포르=김병일 기자 kbi@hankyung.com ----------------------------------------------------------------- < 특별취재팀 > 김영규 정치부장(팀장) 오춘호 김형배 이재창 홍영식 김병일 김동욱 윤기동 기자(정치부) 고광철(워싱턴) 특파원 강혜구(파리)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