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주한(駐韓) 외국특파원들은 '한국경제가 가는 길'을 알려면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포항제철을 보면 된다고 얘기했다. 이들 대표적인 토종 대기업들이 한국경제를 떠받치는 기둥이고 이들이 얼마나 세계적인 경쟁력을 발휘하고 성장하는냐에 따라 한국의 경쟁력이 좌우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토종기업들만 봐서는 한국경제나 산업을 완벽하게 평가하기 힘들게 됐다.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토종 대표기업'들이 한국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역할은 줄어든 반면 외국기업들은 약진했다. 지난 1998년부터 물밀듯이 들어온 외국기업들은 외환위기 이후 절반 이상이 붕괴된 30대그룹의 공백을 메우고 있다. 지난 6월말 현재 한국에 진출해 있는 외국인투자(지분 10% 이상) 기업은 1만7백2개에 달한다. 1998년 6월말 기업수가 4천7백46개였던 점을 감안하면 3년만에 1백25.5%나 늘어난 것이다. 이 가운데 포천지 선정 5백대 기업에 포함되는 기업도 1백70개나 들어와 있다. 한때 고도성장기를 질주했던 삼성자동차 한국전기초자 삼성중공업(중장비 부문) 현대정유 쌍용정유 한솔제지(신문용지 부문) OB맥주 제일은행 한미은행 서울증권 조흥증권 쌍용증권 제일생명 해태음료 등은 모조리 외국기업으로 탈바꿈했다. 이들 외자계는 석유화학 제지 전기전자 기계금속 알루미늄 자동차부품 위스키 할인점 등 주요 업종에서 40~50%를 넘나드는 시장점유율을 차지하며 확고한 '메이저 플레이어'로 자리잡았다. 외자계는 특히 국민은행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간판 기업이나 금융기관들에 대해 70% 안팎의 지분을 확보하면서 한국기업 전체를 '컨트롤'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게됐다. 산업연구원의 장윤종 박사는 "외자계는 기본적으로 수익성이 있는 공장이나 수십년간 독과점 구조를 형성해온 기업들을 사들였기 때문에 빠른 시간에 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외자계는 또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를 통해 한국시장에 안정적인 뿌리를 내리고 있다. 경기나 경제 외적인 변수로 부침을 거듭하는 국내기업들과 달리 외국기업들은 견조한 매출과 수익을 내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지난 1999년 LG산전으로부터 엘리베이터 사업을 인수한 LG오티스의 홍재영 이사는 "4천원짜리 택시영수증까지 꼼꼼히 챙기는 회계시스템으로 인해 누구든지 사내 자금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며 "기분이나 경영 외적인 요인에 좌우되지 않는 것도 글로벌 스탠더드의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나라에서 연간 3백50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 세계적인 자동화업체인 로크웰 오토메이션은 기존 접대위주의 영업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선물은 주지도 받지도 말자'는 원칙을 세웠다. 업무시간을 줄이기 위해 직원들의 각 가정에 홈오피스 장비도 제공하고 있다. IT분야에서는 우리나라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한 한국휴렛팩커드(HP)의 최준근 사장은 기업의 목표를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이 되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한때의 IT호황을 틈타 '반짝 투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를 동북아의 거점기지로 육성한다는 전략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외국기업들의 이같은 자세 덕분에 한국경제의 체질이 훨씬 강화됐다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황상인 박사는 "외국금융기관이나 기업들은 생산성이 높은데다 오랫동안 축적된 리스크 관리노하우를 갖고 있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경영구조를 갖고 있다"며 "우리 경제가 극심한 경기변동에 시달릴 경우 외자계가 그 충격을 일정부분 흡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외자계가 모든 측면에서 우리에게 이로운 것만은 아니다. 아직도 상당수의 투자자금은 단기 벌처펀드의 성격을 띠고 있고 내수에 치중하면서 핵심기술이나 마케팅 기법 이전에도 인색한 편이다. 또 진출입이 빈번한 다국적기업의 속성상 언제 국내에서 철수할지 모르는 불안감도 있다. 외자계의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해서 그들을 배척할 수는 없다. 전문가들은 우리의 투자환경을 세계 어느 나라보다 좋게 만들어서 외국기업이 양질의 투자를 늘리고 한국을 동북아의 거점으로 삼도록 유도하는 것이 현실적인 상책이라고 말한다. 이화여대 전주성 교수는 "다국적기업의 경영패턴과 우리나라의 지역전략및 산업정책을 연계하는 발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제 한국경제는 외국기업을 제쳐 놓고는 더이상 앞날을 기약하기 힘든 시대를 맞고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들과 더불어 나아가야 하고 이들이 한국에 뿌리내려 '귀화(토착화)'하도록 이 땅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몫이라는 얘기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