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사외이사' ] "선진 외국에도 없는 획일적 규제로 기업들을 얽어매고 있는데 누가 마음 편하게 한국에 들어와서 기업활동을 하려 들겠습니까?" 국내 경제계에서 '마당발'로 통하는 외국계 기업인 A씨는 최근 경제관료들을 상대로 한 강연에서 이렇게 하소연했다. 그가 지적한 한국 규제행정의 가장 큰 문제점은 획일주의다. 투자 재무 회계감사 등 거의 모든 기업경영 활동에 대해 일방적인 잣대를 정해 놓고 그 잣대에 해당하는 기업들에 획일적인 규제를 가하고 있다는 불만이다. 그를 비롯한 외국계 기업인들이 획일적 규제의 대표적 사례로 드는 것 중 하나가 사외이사제도다. '자산 2조원 이상의 상장기업과 금융회사는 전체 이사의 절반 이상으로 최소 3인 이상, 다른 소규모 상장기업은 전체 이사의 4분의 1 이상' 올들어 시행된 증권거래법의 사외이사 강제 규정이다. 자산이 2조원 이상되는 대기업은 경영 의사결정에 필요한 의결 정족수의 절반 이상을 외부 인사로 채워야 된다는 얘기다. 사외이사 수를 전체이사의 6분의 1로 권장하고 있을 뿐인 영국에 비해서는 물론 상장법인에 대해 최소 2명 이상의 사외이사를 두도록 하고 있는게 전부인 미국과 비교해보면 국내에 들어와 있는 외국계 기업인들이 왜 불만을 터뜨리는지를 알 수 있다. 미국이나 영국은 '시장'의 필요에 의해 사외이사제도가 자연스럽게 도입됐다는 점에서 한국과는 역사적 배경이 다르다는 지적도 있다. '어떻게 하면 경영의 효율성을 높일 것인가, 어떤 방법으로 투자자와 주주들의 질책을 벗어날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끝에 기업들 스스로 찾아낸 대안이 사외이사제도라는 얘기다. 미국 등에서는 기업 경영진의 책임을 덜고 투자자를 안심시키기 위한 자율적인 제도로 사외이사제가 탄생한 반면 국내에서는 정부가 일방적으로 법규를 만들어 시행을 강요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처럼 획일적으로 국내에 도입된 사외이사제도는 강제로 시행되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부작용을 드러내고 있다. 우선 국내에 전문지식과 경험을 갖춘 사외이사 인력층이 제대로 형성돼 있지 않다는 문제가 지적된다. LG경제연구원이 지난달 국내 60대그룹 계열의 72개사 재무담당 임직원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사외이사의 전문성과 역량이 높다'는 응답은 10%에 불과했다. 사회활동이 많은 '명망가'들이 이사로 들어앉아 온갖 간섭을 다 할 수 있는 구조다. 같은 조사에서 사외이사들 가운데 31%가 의사결정을 할 때 '공공성 제고'에 근거를 둔다고 답했다. 사외이사 3명중 1명이 기업의 경쟁력 제고나 이익추구가 아니라 공공성을 기준으로 경영의사 결정을 한다는 얘기다. 기업측 고민은 현실적인 데도 있다. "사외이사 운용에 적지 않은 비용이 든다. 따라서 이사진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밖에 없다. 당연히 상근 이사도 최소한의 숫자 밖에 둘 수 없다. 더 큰 문제점은 수십년간 일해온 본부장 등 기존 임원의 대부분이 이사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회사내 전문경영인이 이사로서 적기에, 적정한 권한을 행사하고 책임경영을 할 수 있는 채널이 없어진다. 더구나 현실에 맞지 않는 의사결정이 이사회에서 내려져 시행만 강요하는 수도 있다. 이렇다보니 개별회사의 특수성에 맞는 마케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할 때가 있다"(모 대기업 계열사 집행임원 C씨) 홍익대 김종석 교수(경영학)는 "지금과 같은 운영방식이라면 사외이사를 많이 두게 할 필요가 없으며 (대기업의) 과반수 이상 의무규정은 더구나 의미가 없다"고 지적했다. "제도를 도입할 당시 비전문가들이 당위론에다 기업 투명성 확보라는 단순 논리에 입각해 도입한 측면이 있다"는게 홍 교수의 평가다. 사실상 낙하산으로 B공기업 사외이사를 맡고 있는 전직차관 X씨는 "이사로서 책임을 면하기 위해서는 회사의 집행간부나 해당 직원들을 불러 일일이 사업내용을 설명 보고 받은 뒤 시간을 두고 의사결정을 한다"고 말했다. 의사결정이 늦어지는 것이다. '사외이사 인력시장'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점도 걸림돌이다. 집중투표제도 경영권을 위협하고 기업활력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자유기업원의 이형만 부원장은 "사외이사 의무제와 같이 기업의 손발을 꽁꽁 묶는 강력한 제도를 인위적으로 도입해 놓고도 모자라 집중투표제, 집단소송제, 출자한도설정 등의 규제를 더 가하니 무슨 의욕으로 기업을 하겠느냐"고 지적했다. 허원순 기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