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두 시.

"잔인한 달" 4월의 봄볕이 따갑게 내리쪼이는 목동 아파트 단지 파리공원.

후보들이 조직적으로 동원한 "병력"을 포함해 3천여명의 청중이 모였다.

여섯명의 후보가 차례로 나선 양천갑 선거구 합동유세는 민주와 반민주, 개혁과 보수, 여와 야의 울타리가 무너져 내리는 가운데 당선을 향한 집념이 정치적 신념의 일관성을 무자비하게 유린하는 시대적 혼돈의 현장이었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 국부유출, 빈부격차의 심화, 지역편중 인사, 옷로비 사건, 병역비리...

후보들은 이런저런 지역민원 해결 공약을 제외하면 중앙정치 차원에서 익히 알려진 여야간의 논쟁을 반복 재생했다.

야당의 정치신인이 여당의 중진을 매섭게 몰아친다.

여당 후보는 짐짓 여유를 부리면서 국가적 과제에 대한 견해와 공적을 열거한다.

기호 1번에서 4번까지 유력정당의 후보들은 제각기 사진을 들고 종이모자를 쓴 수백명의 운동원과 지지자를 동원하여 세를 과시한다.

군소정당과 무소속 후보는 돈 없고 조직 없는 서러움을 호소한다.

이 모두는 수십년 묵은 우리네 선거문화의 자연스러운 일부였다.

"시대적 혼돈"은 주요 후보자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낸 바, 삶의 이력과 정치적 논리 사이의 충격적 불일치에서 드러났다.

"한국정치의 새로운 힘"을 자처한 한나라당 원희룡 후보는 김대중 정부의 "퍼주기만 하는 대북정책"을 강력하게 비난하면서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한 국가보안법 관련조항의 개정에 단호하게 반대했다.

그냥 변호사라면 모를까, 명색이 80년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출신이라는 "386 후보"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믿기가 어려운 주장이었다.

새로운 힘을 자임하는 그 무모한 용기가 놀라울 따름이다.

함께 연설을 듣던 386 여성유권자가 입을 열었다.

"정말, 싫다 싫어!"

언론계 출신으로서 옛 민정당에서 정치를 시작했던 민주당 박범진 후보.

"교육강국 건설"을 모토로 걸고 3선에 도전하는 그는 한나라당의 전신인 김영삼 총재의 비서실장을 지냈고 김대중 야당총재를 향해 입에 담지 못할 비난을 퍼부은 전력이 있다.

그런데도 한나라당을 "나라를 망친 IMF 경제위기 주범"으로 규정하고 비난하는 어조에는 망설임이나 갈등의 흔적조차 없었다.

예의 386 유권자는 또 한 마디를 던진다.

"싫다 싫어, 정말!"

점차 더워지는 봄날 오후, 짜증나지 않는 이야기를 해줄 그 누군가를 기다리며 끈질기게 자리를 지켰지만 소득은 없었다.

여당과 야당을 오락가락하는 자민련과 지역주의 말고는 기댈 곳이 없는 민국당의 후보가 일관된 신념을 가진 정치인에 대한 갈증을 풀어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삶의 이력과 정치적 논리가 조화를 이룬 경우는 첫번째 등단했던 청년진보당 김삼연 후보뿐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그마저 중산층이 몰려 사는 목동 아파트가 아니라 구로공단 벌집동네에서나 통할 논리를 펼쳤으니.

"하루 10시간 넘게 일해도 목구멍 풀칠하기조차 어렵죠?"

이 우스꽝스러운 논리와 장소의 불일치 때문에 이 일관성 있는 후보는 시종일관 메아리 없는 함성만 지르다 단상을 내려가고 말았다.

혼돈의 현장을 떠나면서 자문해 본다.

누굴 찍어야 하나?

시간이 나흘밖에 없는데.

이 어려운 숙제를 어이 푼단 말인고?

- 서울 양천갑 합동연설회에서

유시민 < 시사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