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재계에서 "구조조정" 다음으로 많이 쓰였던 단어로 "빅딜"(대규모
사업교환)을 꼽을 수 있다.

특히 빅딜의 주체였던 5대 그룹의 경우 더욱 그랬다.

자율 타율의 논란을 떠나 5대 그룹 입장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5대 그룹 총수들이 작년 8월 7일 정.재계 간담회에서 대통령에게 대규모
사업교환을 약속한데다 이후에도 이의 실행을 여러차례 다짐했기 때문이다.

빅딜은 5대 그룹의 개혁의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다시피했다.

5대 그룹 구조조정본부장들은 좋든 싫든 협상 테이블에 앉아 산업지도를
다시 그려야 했다.

핵심역량 집중과 재무구조 개선이라는 빅딜의 명분을 거스를 수 없었다.

국민의 시선이 빅딜에 집중됐다.

5대 그룹 구조조정본부장들은 서울 호텔 롯데에서 조찬 모임을 가질 때마다
언론의 카메라 세례를 받아야 했다.

정부의 서슬퍼런 개혁압박이 쉼없이 이어졌다.

짜여진 스케줄대로 빅딜을 완성하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손병두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의 중재로 끊없는 협상이 이어졌다.

실타레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는 이해를 조정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때론 고성도 오갔다.

여론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막후의 노력도 이어졌다.

어차피 빅딜은 원만한 협상보다 담판을 짓는 성격이 강했다.

그런 만큼 빅딜 협상과정에서 재벌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기도 했다.

빅딜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반도체통합.

현대 LG간 한치의 양보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양 그룹 모두 놓치기 싫은 핵심사업이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빅딜의 시너지효과에 대한 평가도 엇갈렸다.

작년 9월 양 그룹간 반도체 부문을 일원화하기로 합의했지만 진통과 혼선이
잇따랐다.

합병 평가기관인 아서디리틀(ADL)이 현대에 우세한 평가결과를 내놓자
LG측은 반발했다.

한치 앞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LG 구본무 회장이 지난 1월초 급거 청와대를
방문, 양보의사를 밝히면서 빅딜이 급물살을 탔다.

대의를 위해 사업을 넘겨야 하는 구 회장은 눈물을 훔쳐야 했다.

이후에도 매각 조건을 놓고 양그룹의 신경전이 계속됐다.

주식가치 평가와 고용문제 등 풀어야 할 과제가 많았다.

다시 양 그룹 총수와 이헌재 금감위원장의 연쇄 회동이 이어졌다.

이런 과정을 거쳐 2조5천6백억원 규모의 반도체 빅딜이 끝났다.

국내 M&A(인수 합병)사상 최대 규모의 거래였다.

LG는 반도체사업을 넘기는 대신 현대로부터 데이콤 지분 5.4%를 넘겨받아
데이콤 경영권확보에 시동을 걸었다.

이밖에 정유 철도차량 항공산업은 통합이 마무리됐다.

발전설비 선박용 엔진의 빅딜도 타결됐다.

현대와 삼성의 대산단지 통합법인 설립은 일본 자금유치문제로 막판 어려움
을 겪고 있지만 조만간 가닥을 잡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7개 업종의 빅딜이 사실상 끝난 것이다.

빅딜을 통한 몰아주기 과정에서 그룹별 희비도 엇갈렸다.

얻은자의 맞은 편에는 잃은 자가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빅딜의 승자와 패자를 가르기 어렵다.

빅딜 이후 사업 전략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따라 그룹 명운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빅딜의 방법론에 대한 평가도 시간이 흘러야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빅딜은 5대 그룹이 핵심 역량을 강화하는 계기를 준 것만은 사실이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그러나 시장경제에 어긋난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았다.

그때마다 정부는 자율 빅딜을 강조했다.

99년 한햇동안 빅딜의 부담을 던 5대 그룹이 내년에는 핵심 역량을 강화해
우리 경제를 꽃피우길 기대해본다.

< 이익원 기자 iklee@ked.co.kr >

[ 반도체 빅딜 일지 ]

<> 98년 7월 4일 : 정.재계 간담회에서 대기업간 빌딜의 자율적 추진과
정부의 제도적 지원 합의
<> 9월 3일 : 재계, 8개 업종 사업구조조정 방안 발표
<> 11월 11일 : 전경련, 반도체 합병 평가기관으로 아서디리틀 선정
<> 12월 7일 : 정.재계 간담회에서 25일까지 경영 주체 선정 못하면 귀책
회사 제재키로 결정
<> 12월 24일 : ADL, 현대전자에 우세한 평가결과 발표
<> 99년 1월 4일 : 현대 LG 회장, 통합원칙 재확인
<> 1월 6일 : 구본무 LG회장, 청와대 방문서 반도체 사업 양보 천명
<> 2월 11일 : 현대 LG, 금감위서 통합처리절차 10개항 합의
<> 3월 7일 : 주식가치 평가완료 시한 만료, 최종 합의 실패
<> 4월 19일 : 양 그룹 회장, 이헌재 위원장 연쇄 회담
<> 4월 21일 : 양수도 가격 합의
<> 5월 20일 : LG반도체 주식 양수도 계약 체결
<> 7월 26일 : 합병이사회 결의 및 합병계약 체결
<> 10월 15일 : 통합법인 출범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1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