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선 이북에 위치한 강원도 고성군은 남한 최북단의 군으로 이 곳에는
"최북단"이란 접두사가 붙는 곳이 많아 분단의 아픔을 생생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우리들이 꿈에도 그리는 금강산이 손끝에 닿을 듯 바라보이는
남한 최북단의 통일전망대가 있고 최북단의 사찰 건봉사, 최북단 마을
명파리, 최북단 해수욕장 화진포 등이 자리잡고 있어 남북대치의 현실이
피부를 파고든다.
6.25를 앞두고 한국전쟁때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가 최근 복원공사가
한창인 거찰 건봉사를 찾아 역사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또 관동팔경중 제1경인 청간정과 화진포 등 고성군의 때묻지 않은 바다
절경을 둘러보며 상흔을 씻는다.
<>건봉사
금강산의 가장 남단에 위치한 사찰로 신라 법흥왕 7년(520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한 원각사가 그 효시라고 한다.
민통선내에 있으나 지금은 군부대의 허락없이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하다.
건봉사는 원래 전국 4대사찰중의 하나로 설악산의 신흥사와 백담사,
양양의 낙산사를 말사로 거느렸을 정도의 대찰이었다.
3천여칸이 넘는 건물이 들어서 경복궁의 절반정도의 규모를 가졌고
승려수도 7백여명을 헤아렸다 하는데 남아있는 절터가 그같은 크기를
짐작케 해준다.
임진왜란때는 서산대사의 명을 받은 사명대사가 승병 6천여명을 이곳에
집합시켜 훈련을 시켰는데 이때 절앞 냇가가 쌀뜨물로 하얗게 뒤덮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건봉사의 최대보물은 부처님의 진신치아사리.
불치 진신사리는 스리랑카의 캔시시와 건봉사에 모두 15과가 있는데 이중
12과가 건봉사에 모셔졌다 한다.
건봉사 주지 해장 스님은 "부처님의 치아사리는 인도 아쇼카왕이후 왕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며 스리랑카에는 사리를 관리하는 장관과 별도의 경호대가
있을 정도로 귀하게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건봉사의 치아사리도 임진왜란때 왜인이 도굴해 간 것을 사명대사가
돌려받았으며 지난 60년대에도 한번 도난당하는 등 수난을 겪었으나 신비한
능력때문에 제자리로 돌아와 지금은 적멸보궁 뒤편 사리탑과 금고에 분산
보관되고 있다.
6.25전쟁때 유일하게 화마를 면한 불이문도 독특해 강원도 문화재자료
51호로 지정돼 있다.
다른 불이문과 달리 기둥이 4개인데 기둥에 전쟁때 맞은 총탄자국이
아직도 선명하다.
현판은 숙종때의 명필 해강 김규진의 글씨다.
절을 한바퀴 돌아나오면 금강산의 남쪽 너른 자락에 대가람을 이루었을
6.25전쟁이전의 건봉사를 상상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통일전망대
해발 70m의 전망대에서 금강산이 가깝게는 16km, 멀리는 25km 떨어져 있다.
우선 바다쪽으로 해금강이 선명하게 눈앞에 다가선다.
바다쪽을 향해 만물상 현종암 사공암 부처바위 등이 저마다 특이한 형태를
뽐내고 있다.
정북방에는 1만2천봉중 마지막 봉우리인 낙타모양의 구선봉이 있고 일출봉
집선봉 옥녀봉 관음봉 등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눈을 아래로 떨구면 통한의 철책이 가슴을 저미게 한다.
<>화진포
맑은 물과 고운 모래, 소나무로 뒤덮인 해변의 정취가 뛰어난 화진포는
이름 그대로 아름답기 그지없다.
해방을 전후해 이승만 전대통령과 김일성의 별장이 들어선 것이 이를
입증한다.
김일성별장터는 화진교를 지나 군부대 콘도옆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데
바다를 내려다보는 전망이 빼어나다.
고성군 문화공보실의 이선국 계장은 "호수와 바다, 그리고 선사시대유적
등이 있는 화진포를 리조트단지로 개발하기 위해 현재 연구용역을 맡겨놓은
상태"라고 말했다.
<>청간정
남한땅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관동팔경의 하나이다.
7번국도에서 가까운 청간정 누정에 오르면 탁 트인 동해의 맑고 푸른 물이
한눈에 들어오고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합수머리도 목격하게 된다.
이 개천에는 초여름이면 은어떼가 몰려든다.
고성군청에서 건봉사는 11.2km, 통일전망대는 19.2km, 화진포는 16km,
청간정은 20.3km 거리에 있다.
문의 고성군청 (0392)680-3223
< 고성(강원)=노웅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