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만의원 (자민련)

-김현철씨와 언제 알았나.

"87년 대선때부터 알게 됐다.

93년이후 1백번이상 만났다"

-김씨와 등산을 같이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이성호씨와 박태중씨 그리고 한 두명이 교대로 같이 참석하는 것으로 안다"

-현철씨와 정보근 한보회장이 가까이 지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나.

"현철씨가 이성호씨에게 전화를 걸어 박태중씨와 술자리를 만들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현철씨가 4.11총선당시 공천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나.

"있다.

대표적인 예가 나의 형인 박경재 변호사이다.

한이헌씨의 경우 본래 부산 해운대구에 출마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자신은
고향인 김해를 원했었다.

여론조사 결과도 지는 것으로 나왔다.

그래서 한씨가 현철씨에게 부탁해 조정한 것으로 안다"

-현철씨가 "대통령 임기만료후 부산시장에 출마하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는데.

"국회의원에 나가려다가 지방자치제 선거 참패 때문에 출마를 포기한 걸로
안다.

부산시장 출마를 고려한 것으로 안다"

-메디슨을 대통령주치의인 고창순씨와 김현철씨가 지원해 주고 있다는데.

"현철씨와 고창순씨는 메디슨 후원자이다.

한승수씨도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있을 때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안다"

-현철씨가 만난 관료도 있나.

"나보다 정치인들이 더 잘알지 않나"

-현철씨가 야당의원 보호를 위해 정략적인 공천을 했다던데.

"이부영의원에 국한해서 말하면 현철씨는 이의원이 비록 당과 이념을
달리하지만 언젠가는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일하고 싶다는 느낌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증인과 현철씨의 관계를 중재하기 위해 거물 정치인이 나섰다는데.

"제3자를 통해 연락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권력의 속성상 현철씨의 부탁보다는 단독으로 나선 것같다"

-접촉한 사람을 얘기해 달라.

"그 사람의 정치적 입장을 고려해야 한다"

-정치인 당직과 관련해서 현철씨가 개입한 사실은.

"이홍구 총리와 김철 대변인 임명사실을 하루 전날 현철씨에게 직접 들었다"

<> 이인구의원 (자민련)

-김현철씨와 김덕룡의원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내가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이 김덕룡 신경식씨이다.

김덕룡의원은 사실 김현철씨와 가까운 사이가 아니다.

한번은 김의원이 영부인에게 "사이비종교인을 만나지 말라"고 하자 영부인
은 "아저씨(김의원을 지칭) 왜 종교문제까지 건드리느냐, 아저씨는 정치만
하라"고 말한 적이 있다"

<> 맹형규의원 (신한국)

-박태중씨가 김씨의 제일 큰 돈줄이라고 했는데 어떤 근거인가.

"항상 박씨 사무실에 김씨 사무실이 있었다.

박씨가 김씨 사무실 직원들 비용을 댄다고 했다"

<> 이상수의원 (국민회의)

-현철씨가 정치인들과 깊은 관계를 맺은 것은 대선때만이 목적이 아니지
않은가.

"30~40대 인사들과 친교를 맺은 것은 대선만이 목적이 아니다.

국회의원 보좌관이 국회의원 되려고 하는 것처럼 대통령 아들인데 그런
성격 갖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김기섭 오정소씨를 아나.

"96년 2월말 현철씨가 신라호텔 647호로 와보라고해 갔더니 김기섭씨와
처음 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오정소씨였다"

-이성호 전대호건설사장의 아버지 이건씨가 노태우대통령의 비자금 사건때
입건돼 김현철씨가 풀어주겠다고 해놓고도 집행유예를 받아 두 사람의
관계가 소원해진 것이 아니냐.

"현철씨가 흐름에 따르라고 했다.

이성호씨는 자기 아버지보다 더 비자금을 조성한 사람이 많은데 아버지가
뭐 그리 잘못했느냐며 섭섭하게 생각했다"

-김현철씨가 사조직 운영 등에 많은 돈을 쓰고 있다.

누가 해주는 것인지 아느냐.

"눈먼 돈이 많이 있을 수 있다"

<> 김경재의원 (국민회의)

-경실련의 양대석씨가 민주계 실세의 비서출신이었다는 것을 들었나.

"양씨가 그 얘기도 했다.

최형우씨로 기억한다"

-92년대선에서 김영삼후보는 법정경비(3백20억원)이상을 쓰지 않았나.

"피차간에 많이 쓰지 않았나"

<> 이사철의원 (신한국)

-김현철씨가 증인에게 국정개입관련 얘기를 왜 했다고 생각하는가.

"그것밖에 할 얘기가 없지 않은가"

< 허귀식.김태완.손상우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