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달라하라는 멕시코 고원에 자리잡은 인구 3백만명의 도시로 멕시코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다.

일반적으로 한 나라에서 제1의 도시인 수도가 정치 경제의 중심지라면
제2의 도시는 문화 중심지 역할을 한다.

과달라하라도 그러한 도시 중의 하나이다.

멕시코를 상징하는 솜브레로 춤, 마리아치 음악, 데킬라의 원산지가 모두
과달라하라이다.

한마디로 과달라하라는 가장 멕시코적인 도시이다.

1542년 식민지 정착촌으로 과달라하라는 시작되었다.

과달라하라의 이름은 정착촌을 세운이의 스페인 고향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처럼 과달라하라 역사에서 스페인의 영향력을 빼놓을 수는 없다.

시내 중심부의 광장, 1616년에 완공된 대성당, 1774년에 완공된 주청사
등의 시내 주요 건물에서 스페인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과달라하라는 할리스코주의 수도이다.

할리스코주의 남서쪽에 위치한 미초칸주에는 현재까지도 농업에 종사하는
인디오 마을들이 많은 것에 비해 고원 지대에 위치한 할리스코에서는 처음
부터 목축업이 발달했다.

이런 목축업은 로데오 경기를 발전시켰고 아직도 매주 일요일이면
과달라하라에서는 로데오 경기가 벌어진다.

또한 마리아치 그룹들이 멕시코 카우보이인 차로들의 복장(솜브레로, 가죽
장화, 검은색에 은 장식을 한옷)을 하고 연주를 함으로써 그들의 옷이
멕시코를 대표하게 되었다.

보통 사람들은 솜브레로(큰 밀짚모자), 면바지와 면셔츠, 허리에 붉은 천,
어깨에 양모로 만든 판초, 샌들 등으로 이루어진 것을 많이 입었는데 이는
멕시코의 전통복장이 되었다.

과달라하라는 음악이 살아 숨쉬는 도시이다.

저녁 나절이나 시내 중심부의 광장에서 언제나 무료 음악회나 민속 공연을
볼 수 있다.

특히 토요일 오후에는 유서 깊은 성당에서 파이프 오르간의 연주속에 많은
결혼식이 거행되는데 미혼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꿀만한 낭만과
엄숙함이 넘치는 그런 분위기가 성당안을 가득 채운다.

1800년대 부모는 스페인 사람이지만 멕시코에서 태어난 백인들을 크리오요
라고 불렀다.

이런 크리오요들이 스페인 태생이 독점한 경제적 사회적 불이익에 대항하기
시작하면서 독립 전쟁이 발발했다.

이런 독립과 자유에 관한 생각은 대형 벽화 운동에도 영향을 줬다.

과달라하라 시의 주요 관공서에는 멕시코의 거장 오로스코가 그린 대형
벽화를 볼 수 있다.

목축업을 중심으로 하는 주여서 할리스코 음식에는 고기를 재료로 한
음식이 상당히 발달했다.

이를 가장 쉽게 느낄 수 있는 곳이 리베르타드 시장이다.

인구 3백만명의 도시이지만 고층 건물이 없어 시역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넓다.

높은 건물이 없는 이유는 지진이 발생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초에 설계한 도시 구획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확장했고 도심
곳곳에 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상당히 잘 짜여진 도시라는 느낌을 받는다.

강문근 < 여행가 >

[ 여행정보 ]

멕시코는 비자 없이 3개월간 체류할 수 있다.

과달라하라에는 국제 공항이 있고 로스앤젤레스에서 직항편도 있다.

멕시코시는 과달라하라의 남쪽 5백35km 지점에 위치하며 버스로는 8시간,
비행기로는 한시간 정도 소요된다.

미국 국경까지는 버스나 기차로 30시간정도 걸린다.

과달라하라에 관한 여러 정보는 http://www.mexguide.net/guadalajara/에서
알아볼 수 있다.

과달라하라를 방문하기에 가장 좋은 요일은 일요일이다.

왜냐하면 과달라하라 대학교의 민속 공연이 데고야도 극장에서 매주
일요일 오전에 행해지기 때문이다.

마리아치와 민속춤으로 구성된 민속 공연은 멕시코 시에서도 볼 수 있지만
멕시코시의 공연이 발레적인 요소를 많이 가미한 것에 비해 과달라하라의
공연은 멕시코적인 요소가 강해 색다른 묘미가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