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공자원부 산업정책국장실의 국직제표. 표의 최상단에 각과의 주사(6급)
명단이 올라있다. 그 다음이 담당사무관->과장의 순으로 내려간다. 국장이
가장 밑이다. 거꾸로 놓여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아예 "역피라미드"로 그려놓은 것이다. "상명하복"을
규율로 하는 관료조직 직제표치곤 하나의 파격이다. "변화를 채찍질해 보자
는 시도다. 직제표를 바꾸고보니 상위직급이 짓눌려있음을 실감케 됐다"
(최홍건국장)

최근 관료사회에 돌풍을 몰고있는 "기업으로부터 배우기"가 가져온 작은
변화다.

변화는 지난 2월초부터 시작됐다. 전부처의 과장급이상이 참여해 진행된
"고위공직자 민간기업위탁연수"가 몰고온 바람이다. 개발연대 경제관료들
에겐 생각도 할 수없었던 일이다. 그때는 기업을 떡주무르듯 했다. 심지어는
오늘의 굴지대기업들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들이 지금은 기업들을 "훈장"
으로 모시고 "교육"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게되기도 했다. 우리사회는 개발연대 "총론"의 시대에서
"각론"의 시대로 급속히 접어들고 있지 않은가. UR(우루과이 라운드)타결이
이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각론"에 까막눈이다시피 해온 경제관료들에게
"체면"보다 더 다급해진게 "민간학습"이다. 부처별로 민간기업관계자들을
초빙해 강의를 듣는게 유행처럼 돼있다. 가장 국내적이고 자존심도 강하다는
국세청이 그 대표적인 예다. 업계전문가들을 "모셔다" UR강좌를 듣고있다.

고위공직자 민간연수는 이런 부처별 민간학습의 확대판이다. 무려 1만
2천여명이 이 연수를 받았다. 전체의 절반이 넘는 6천9백37명의 공직자가
거쳐간 경기도 용인의 삼성그룹 연수원. 이곳이 경제계에 몰아닥친 "신경영
신드롬"의 진원지였던 만큼 뒷얘기도 많았다. 2박3일씩 교육이 이뤄졌다.
"나리"들은 시각조정과 재충전이란 선물을 받은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단순히 관료들이 "한수 배운" 행사가 아니었다. 관료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역작용도 적지 않았다. 그건 분명 변화에 대한 갈등이다. 확대
해석하면 저항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특히 경제관료들이 그랬다. 연수를
받은 사람들의 소감을 들어보자. 우선 내무공무원등 일반행정관료들의 자평.

"공무원들에게 기업가적인 서비스정신을 심어준 유익한 기회였다"(허태열
내무부 지방행정국장) "국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기업의 현장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관료사회의 국제화를 한단계 높일 수 있을
것"(최석충총무처 전자계산소장)

경제관료들의 감상은 어떤가. "6차례에 걸친 정부의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이 한국경제발전에 기여한 것은 전혀 무시한채 ''정부가 기업성장의
발목을 잡고있다''고 주장하는 대목에서는 얼굴이 달아올랐다"(경제기획원
K국장) 이윤추구를 지상과제로 삼는 기업과 "공공효율"을 우선시해야 하는
관료조직은 다르다는 주장이다.

이런 차이를 도외시한 강좌내용에 분개했다고까지 재무부의 어느 간부는
말한다. "일방적인 기업논리전파"에 실망했다고도 한다. 대놓고 말을
안해서 그렇지 이런 반발의 논리속엔 좌절의 역설적 표현이 감춰져 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관료가 기업으로부터..."라는.

분개와 실망. 그러나 그건 그들이 자초한 결과치로 볼 수있다. 경쟁력수준
에서 그들의 상당수는 이미 민에 대해 비교열위에 서있다는 얘기다. 여기
그 좋은 예가 있다.

김영삼대통령의 일본 중국 공식방문을 앞둔 지난 3월초. 청와대 경제
비서실은 부쩍 바빴다. 김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챙길 의제를 기업들에
시시콜콜이 물어챙겨야 했기 때문이다. 대기업관계자들을 긴급 호출해
보고서까지 받았다고 한다.

민과 관이 서로 지혜를 짠다는 점에서 문제될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 일
에 참여했던 어느 대기업그룹 임원의 얘기는 이렇다. "동경에 머무는 동안
어느 곳을 방문해야 좋겠는가고까지 기업들로부터 일일이 자문(?)을
구하는데는 ''한심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어쨋든 관료사회가 "머리를 수그리고" 기업 "훈장"들 앞에 모여들고 있는
건 커다란 변화다. 경제관료들은 이같은 변신노력을 "컨틴전시
(Contingency)이론"을 걸어 설명(상공자원부 K과장)한다. 상황이 바뀐만큼
관료사회도 그 변화를 좇고 있다는 얘기다.

그럴듯한 풀이다. 하지만 관료들에 요구되는 변화가 이런 "이론"만을
좇는다고 이뤄질 수는 없다. 변화에 대한 내부갈등과 저항부터 잠재워야
한다.

"과거급제" 전통을 업고 한국사회의 "일급엘리트(first elite)"로 자부해온
관료조직이 "기업조직은 세컨드 엘리트집단일 뿐"이란 인식자체를 떨궈
내느냐가 중요하다는 얘기다(한동우동양투자금융사장). 이런 근본적인 의식
혁신을 전제하지 않은채 민간기업으로부터 위탁연수를 받건, 규제완화작업을
추진하건 그 모든 것은 단지 "쇼 비즈니스일 뿐"(백영훈산업개발연구원장)
이란 냉소만을 부를 수도 있다.

직제표의 탈바꿈이 진정한 관료들의 의식개혁으로 구체화되느냐가 그래서
더 관심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