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바에서 한국과 미국간에 벌어지고 있는 협상과정을 지켜보면
우리나라가 코가 꿰어도 단단히 꿰었다는 걸 갈수록 실감케 된다.
미국의 전략에 말려들어 질질 끌려가고 있다는 인상때문이다. 얼마나
될지도 모르는 "선물"을 기다리면서 씨감자까지 퍼내주는 어리숙한
촌뜨기를 연상케 된다.

정부 대표단은 서울을 떠나기 직전 "패키지 딜"방침을 밝혔었다. 쌀을
지킬수 있다면 다른 분야를 희생해서라도 사수하겠다는 "연계"방안이었다.
공산품과 금융분야에서 쌀시장고수를 지원하기위해 담당부처 차관보를
함께 내보낸다고 공공연히 설명했다.

쌀개방에 목을 죄고있는 많은 "국민"들이 보기엔 참으로 가상하기 짝이
없었을게다. 정부가 끔찍이도 농민을 사랑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을
법하다. 어차피 개방을 "당하더라도"정부가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고
느꼈을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밖에서는 그 발표가 "협상전략 노출"로 귀결됐다.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내줄 각오와 준비가 돼있음을 적에게 알려주고 말았기 때문이다.
못들은 척하고 잠자코 있으면 자기들이 알아서 죽자사자 덤벼들테니
기다리기만하면된다는 전략을 상대편에 제시해준 셈이다.

실제로 이런 우려는 그대로 나타났다. 미국은 우리대표단장인 허신행
농림수산부 장관과 4차례에 걸쳐 장관급회담을 하면서 쌀문제만을
얘기했다. "연계"라는 말은 입밖에 꺼내지도 않았다.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내주겠다고 알려주기까지 했는데 도데체 말이 없었다.

그러면서 쌀은 제법 진척을 시켰다. 대표단은 만족해했다. 관건인
쌀문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수월히 진전되고 있고 쌀때문에 다른분야는
하나도 내준게 없기 때문이었다. 허장관은 실질적으로 마지막이자 4번째
장관급협상인 미키 캔터 미무역대표와의 회동후 자랑스럽게 말했다.
"쌀때문에 다른분야를 지나치게 내줄까봐 걱정들을 많이 하는데 아직까지
쌀이외 부문에서는 내준게 없다"고.

한데 제네바에 있던 미국의 장관급들이 "나중에 다시보자"며 미국으로
돌아가는가 싶더니 지난8일 느닷없이 실무회동을 요구해왔다. 제네바에
와있는 차관보급이 모두 나오라는 "요청"이었다. 미국이 먼저 회의를
요청한건 이게 처음이었다.

그리고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쌀은 차관보급회의에서 논의하기엔 벅찬
사안이니 장관급회의로 넘기자"고 해왔다. 거부할 명분이 없는
제안이었다. 자연스레 논의는 금융과 공산품으로 흐를수밖에 없었다.
회의결과는 뻔했다. "우리나라가 쌀이외의 부문에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노력하고 있다는게 미측의 반응이었다"고 대표단의 대변인이 회의결과를
설명했다. 미국이 보기에 "바람직하다"고 보는 방향은 두말할것도 없다.
자진해서 다 벗어던졌다는 말이다.

한데 이날 회의에서 미측은 "쌀을 원하면 다른것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았다. 우리대표단의 대변인도 "미측이 ''연계''를 원했다면 응했을 텐데
미측이 연계를 요구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각분야의 팀장들은 바빠졌다. ''연계''를 요구하지 않았지만 갑자기
내줄것을 찾아야하게 됐기때문이다. 워싱턴을 거쳐 서울로 가려던
재무부차관보는 워싱턴 공항에 내리자마자 제네바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야했다. 상공자원부 차관보는 한꺼번에 날벼락을 맞고 숙소에서
긴급대책회의를 하랴,본국에 훈령을 요청하랴 눈코뜰새가 없어졌다.

미국의 전략에 깨끗이 당한 꼴이다. 미측의 실무자들이 워낙 ''잔인''해
장관급 회의를 통해 절충을 시도하고 싶지만 장관들은 모두 미국으로
가버렸다. 더군다나 가장 중요한 쌀을 맨뒤에 논의키로 했으니 그때까지
미국의 심기를 건드려서는 안되게 돼있다. 이젠 꼼짝없이 내주는 수밖에
없다. 그냥 내주는게 아니라 받는쪽의 눈치까지 살펴가면서 내주게 됐다.

이과정에서 미국이 우리에게 내놓으라고 한번도 강요한 일이 없으니
이번엔 "힘"의 논리라고 발뺌할수도 없다. 바로 "연계"를 먼저 공개해
협상전략을 노출시킨 정부의 어수룩함이 스스로 코를 꿴 결과다.

"연계"소리를 입밖에 내지도 않고 "연계"를 끌어낸 미국,그들은 금융과
공산품을 무참하게 짓밟고 협상을 마칠때까지 "연계"소리를 않을 것이다.
아마 쌀과 금융 공산품에서 모두 터지고 나서도 우리정부는 "미국이
"연계"를 요구하지 않아 쌀때문에 다른 부문에서 내준 것은 없다"고
자랑할는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