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저리채권 발행은 애초 형평차원에서 배제됐었다. 실명제를 개혁과
사정차원에서 단행한 면이 강해 과거를 완전히 덮는 수단이 될 수 있는
무기명채권 발행은 제외됐다.

그동안 성실히 세금을 내온 수많은 사람들의 정서와는 거리가 먼 것
이었다는 점애서다. 정치권과 일부 경제계에서 실명제를 조기에 정착시키고
경제활성화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나,김영삼 대통령
은 형평에 어긋난다며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었다.

정부는 산업자금화라는 명분으로 그간의 정책을 180도로 뒤집었다. 기명
으로 하되 자금출처 조사를 면제,비실명자금이나 퇴장자금을 산업자금으로
활용하겠다는 논리로 채권발행을 선택했다.

큰손들의 실명전환이 늦고 전반적인 분위기가 경색돼 형평만을 내세우기
에는 사정이 다급했던 것이다. 채권발행의 설득력이 있다는 주장도 있으나
자금출처를 조사하지 않는다는 방침이 또다른 불형평을 낳을 것이라는
비판도 거세다.

장기저리채권이 잘 팔릴 것인가. 채권이 안팔릴 경우 채권발행의 실효성도
없으면서 실명제의 근본취지만 흔들고 말았다는 비판이 거셀 것으로 예상돼
매각여부가 관심을 끌고있다.

채권판매의 여부는 금리상의 불이익과 자금출처조사 배제의 메리트간의
저울질에 의해 좌우된다.

우선 채권을 사 곧바로 팔았을 경우 얻는 현금과 채권을 사지않고 자금
출처조사를 받아 상속세나 증여세를 물었을 경우 건질수있는 돈을 비교하면
채권매입이 상속보다는 불리하고 증여보다는 다소 유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예컨대 10억원짜리 (연3%)를 사 유통시장에 내다팔면 건질수있는 돈은
3억5천7백만원에서 6억8백만원정도다. 이는 유통시장에 내다 팔 경우
장기채권의 대표격들인 국민주택 채권 2종의 최근 유통수익률 8.25%,서울시
지하철 채권수익률 14.17%를 기준으로 계산한 것이다.

10억원에 대해 상속세를 물고나면 6억8천5백만원,증여세를 물고나면
5억4천7백만원을 받게돼 수익률이 좋은 국민주택채권을 기준으로하면
채권을 사서 파는게 상속보다는 불리하고 증여보다는 유리하다.

30억원어치의 채권을 사 유통시켜도 비슷한 결과가 나온다.

이계산을 토대로하면 채권을 매입(매각전제)하는게 상속세를 무는것보다
손에 쥐는 돈의 절대량면에서 다소 불리한 것으로 볼수있다.

다만 이채권을 매입후 팔지 않고 만기때까지 보유했을 경우에는 비교가
어렵다. 10년후 채권의 원리금은 계산할 수있지만 상속 증여후 받은 돈을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원리금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한은은 향후 10년간 연평균 금리가 8%이상을 유지하면 채권매입이 불리한
것으로 추정했다. 10억원의 자금에 대해 상속세를 내고 앞으로 10년간
연평균 8%로 유지할수 있다면 채권을 사는 것보다 실명전환하고 상속세를
내는게 유리하다는 것이다.

물론 10년간의 자금운용금리가 연7%선 밑으로 떨어진다면 채권을 사 만기
까지 보유하는게 유리한 것으로 추계됐다.

금리수준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른지만 연7% 밑으로 내려가기는
어렵다는게 일반적인 지적이어서 채권을 매입해서 유통시장에 팔든 만기
까지 보유하든 채권매입쪽이 이재면에서만 본다면 다소나마 손해를 볼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실명전환을 꺼려온 큰 손들은 자기돈좀 손해보는 것에 그리
민감하지 않을 수도있다. 돈좀 뜯기더라도 출처를 캐지않는다면 그들은
대환영할 가능성이 크다. 그동안 실명전환을 늦추고 눈치를 봐온 것도
어떤 형태로든 뒤를 캐는 조사를 완화하는 조치를 은근히 기다렸기
때문이다. 채권발행은 정부가 이에 화답한 것이라고 볼수있다.

그간 구리거나 얼굴을 내밀기 어려운 돈을 움켜쥐고 있던 큰손들에게는
자금출처조사배제가 큰 매력이 아닐수 없다. 자손들에게 합법적으로
상속이나 증여할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문제는 이들이 정부가 밝힌 자금출처조사배제를 액면 그대로 믿을
것인가에 있다. 일반인들은 그동안 너무나도 많이 속아왔다고 불평하고
있다. 정부정책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져 있는 셈이다.

이런 상태에서 정부는 장기저리채권을 발행하지 않겠다고 공언했음에도
이날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꿔버렸다.

자금출처조사 배제에 대한 믿음역시 생길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만일 큰손들이 자금출처조사배제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한다면
채권은 팔리기 어렵게 된다. 보완대책의 핵심이 어긋나는 셈이다.

결국 채권발행의 성패는 자금출처조사배제에 대한 신뢰도라 할수있다.

금융계에서는 채권판매여부에 대해 낙관과 비관이 엇갈리고있다. 비록
금리면에서는 불리하더라도 뒤를 조사받지 않는다는 확신만 선다면
어느정도 팔릴 것이라는 전망이 가능하다. 그러나 확신이 서지 않을 경우
채권을 사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빠져나갈 궁리를 할 것이라는 지적도
많다.

정부는 이번 장기저리채권의 발행이유를 비실명으로 남아있는 자금이나
실명전환후 퇴장된 자금을 산업자금화하는 것이라고 발표했으나 이해하기
어렵다는 비판이 제기되고있다.

실명으로 전환하든 안하든 금융기관에 있는 돈은 어차피 금융기관들이
운용,산업자금으로 쓰일수 밖에 없다. 금융기관에 있는 돈중
비실명이라해서 엉뚱한 곳으로 쓰이지 않는 것만은 분명한데 정부는 무슨
논리로 산업자금화라는 명분을 내걸었는지 알수없다는 것이다. 또 퇴장된
자금을 운운했으나 퇴장된 자금은 많지 않다고 정부가 누누이 강조해왔고
설령 그 돈이 많다고 하더라도 퇴장된 자금이 이 채권을 살 것으로
기대하는것은 환상이라고 금융계는 지적하고있다.

이밖에 채권매입자에 과거를 묻지 않기로 한것은 오랫동안 성실하게
세금을 내온 월급쟁이들을 실망시키는 조치라는 비난도 거세다.

<고광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