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가 일어나고 민주당정부가 수립되자 산업개발위원회(EDC)에는 장기
경제개발계획의 작성이 지시됐다.

EDC는 흐트러진 원고를 정리하는 한편 오리건대학 고문단과는 별도로
미국"랜드연구소"의 찰스 울프박사를 새고문으로 초빙하여 한국경제의
공업화 모델을 작성케 하는 등 본격적인 개발계획을 준비하였다.

61~65년을 기간으로하는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작성하여 거의 완성단계에
있었으나 이번에는 61년의 5.16군사혁명으로 또 그 빛을 보지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군사정부에서 작성한 제1차경제개발5개년계획의
기초가 되었다.

군사정부는 절망과 기아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해결하고 경제자립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강력히 추진할것을 천명하였다.

그리하여 최고회의 밑에 기획위원회가 생기고 유원식장군이 위원장이 되어
5개년계획작업에 들어갔다.

갑자기 계획을 만들다보니 사람이 없어 각부처와 국책은행,그리고 학계 등
에서 사람을 강제징발,일을 시켰다. 나도 징발되어 가보니 많은 사람들이
와있었는데 뭔가 일을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별일없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나에게도 뚜렷이 부여된 임무가 없었다. 그래서 몇시간
기다리고 있다가 슬그머니 나와버렸는데 결국 2~3일 나가다가 그만
두었다.

계획은 짧은 시간내에 급히 서둘러 작성하였으나 그것은 민주당정부때
EDC에서 작성한 5개년계획안을 토대로 군사정부의 의지를 가미해 계획지침
을 마련하고 이 지침에 따라 각부처의 투자계획을 조정 정리,경제기획원이
세부계획을 작성해 62년1월에 확정 발표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당시 통계자료가 미흡했고 계획작성기법이 미숙한데다
국민의 개발의욕에 보다 빨리 부응하기 위해 계획목표를 너무 의욕적으로
설정했고 투자재원조달방안이 비현실적이었던 점등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이로인해 국내외로부터 많은 비판이 있었으며 특히 세계은행은 경제성장률
수출목표 투자소요등이 너무 높게 잡혔다는 점등을 들어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했다.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군사정부는 계획을 강력히 밀고 나갔으나 집행한
지 1년도 채못되어 화폐개혁을 단행,경제적 혼란을 초래했다. 또 기후가
좋지않아 농작물의 흉작이 겹치는등 경제여건의 악화로 인해 목표성장률을
재조정하는 등 계획내용을 크게 보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때 화폐개혁은 62년6월10일을 기하여 단행되었는데 "환화"를 10대1의
비율로 "원화"로 바꾸는 해방후 두번째의 화폐개혁 이었다. 당시 화폐개혁
의 목적은 음성자금의 투기화를 방지,산업자금화하고 악성인플레이션을
막기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군사정부는 통화는 많이 발행되었는데 일부에서,특히 화교들이
현금을 퇴장시키고 있기때문에 산업자금이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이돈을
끌어 내기 위해 화폐개혁을 단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생각했던것처럼 화교들이 신고한 퇴장된 돈은 많지 않았다. 결국
화폐개혁은 그목적을 달성하지 못한채 오히려 경제에 부작용만 남기고
말았다.

김정 (상공.재무장관을 거쳐 대통령비서실장 역임) 회고록에 의하면 화폐
개혁은 5.16후 얼마되지 않아 곧 구상되었으며 처음에는 유원식 장군과
당시 최고회의 자문의원이던 서울대 상대 박희범 교수가 박정희 의장의
지시로 세부계획을 작성했다.

그러나 그 안이 너무 조잡하고 실천하기 어려운 내용이었기 때문에
폐기되고 김정씨를 중심으로한 한국은행 출신 몇사람이 통화개혁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당초 김정 씨와 작업반 일동은 산업자금조달을 위해서라면 통화개혁이란
비상조치보다는 전통적인 재정금융수단을 쓰는 것이 원칙이라는데 의견을
같이하고 군사정부에 반대의 뜻을 전했으나 그의견이 채택되지않고
통화개혁은 예정대로 단행되었다고 한다.

경제란 충격적인 요법에 의해 해결되기 어렵고 시장원리에 의해 풀어
나가는 것이 시간은 걸리더라도 부작용없이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교훈을
남긴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