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대한상의 회장이 지난달 21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제3회 대한민국 사회적가치 페스타' 개막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대한상의 제공
SK그룹은 국내 사회적 가치 경영의 원조 격인 기업이다. 그 뒤에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2018년부터 직접 주창해 온 ‘사회적 가치 측정·보상’ 철학이 있다. SK는 이를 바탕으로 성과를 낸 사회적기업에 직접 보상하는 ‘사회성과 인센티브’를 10년째 실험해 왔다.
SK에서 시작한 사회적 가치 실험은 한 기업을 넘어 전국 단위로 확대됐고, 이젠 인공지능(AI)과 결합해 글로벌 경제 시스템의 의제로 확장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사회적 가치 측정·보상 실험 10년
최 회장이 사회적 가치에 주목한 것은 2013년부터다. 당시 세계경제포럼(WEF)에서 사회문제 해결 성과를 측정하고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제공하자는 ‘사회성과 인센티브(SPC)’ 개념을 제안했다. 사회적 가치를 측정해 경제적 인센티브와 연결하면 더 많은 기업이 사회문제 해결에 참여하고 이를 지속가능한 경제활동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구상이었다.
SK는 2015년부터 사회적기업이 창출한 사회성과를 화폐가치로 측정하고 그에 비례해 현금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SPC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기업이 사회문제를 해결해도 그 성과가 매출이나 이익으로 직접 연결되지 않는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실험이다. 사회문제 해결에 기여한 기업이 경제적 보상을 받고, 이를 바탕으로 다시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사회적 가치 실험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건 최 회장이 2021년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맡으면서부터다. 그가 취임 후 신설한 ‘대한민국 사회적가치 페스타’는 2024년 제1회를 시작으로 올해 3회를 맞으며 정부·금융·시민사회가 함께하는 국가 경제 의제로 자리 잡았다. ‘생각을 넘어 행동으로, 문제를 넘어 해결로’를 주제로 열린 올해 행사엔 정부와 기업, 시민사회, 국제기구 등 400여 개 기관이 참여했다.
최 회장은 지난 9월 21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제3회 대한민국 사회적가치 페스타’에서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AI 활용과 성과 기반 보상 시스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착함과 선한 마음에만 기대는 것은 오늘날 급격히 늘어나는 사회문제를 푸는 데 한계가 있다”며 “사회문제를 얼마나 해결하는지 측정하고 그 성과에 합당한 보상과 투자를 만들어 내는 구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 10년간 진행한 SPC 실험을 소개하며 “470여 개 기업이 5400억 원의 사회성과를 만들어 냈고, 보상받은 기업들의 매출도 35% 정도 성장했다”고 밝혔다. 최 회장은 “사회문제를 풀어도 보상이 따라가는 시스템이 되면 사회문제를 푸는 것도 경제적 이익이 된다”며 “AI와 사회적 가치가 만나는 지점에 우리의 새로운 성장이 있다”고 강조했다.
AI 접목 글로벌 경제 시스템으로 확장
최 회장은 AI 시대의 사회문제 해결 방향도 제시했다. AI로 복잡한 사회문제의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찾아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동시에 사회적 가치의 측정 비용도 낮춰 더 많은 기업이 사회문제 해결에 참여하도록 하겠다는 구상이다. 그는 “AI와 사회적 가치가 만나는 지점에 우리의 새로운 성장이 있다”며 “AI가 현상을 알려주지만 그 현상의 진짜 문제를 치유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사회적 가치 경영은 국내뿐 아니라 WEF 등 국제기구의 주요 논의 대상으로 발전하고 있다. 지난 10월 12일에는 사회적기업월드포럼(SEWF)이 사회적가치연구원(CSES)과 함께 서울에서 첫 ‘생태계 리더십 교류(ELE)’ 프로그램을 열었다. 세계 각국의 사회혁신 리더들이 한국의 사회적 경제 생태계와 사회적 가치 창출 경험을 살펴보고 이를 각국의 정책과 시장에 적용하는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다.
SEWF는 2008년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시작된 사회적기업 분야의 글로벌 네트워크다. 지난해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연례 포럼에는 65개국 이상에서 1000명 넘게 참여했다. 이번 ELE는 SEWF가 특정 국가의 사회적 경제 생태계를 현장에서 살펴보기 위해 새롭게 마련한 프로그램이다. SEWF는 첫 ELE의 개최지이자 학습 대상으로 한국을 선정했다.
최 회장은 ELE 첫 세션에서 “기존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활동은 예산 투입과 홍보를 중심으로 이뤄져 실질적인 사회적 성과를 측정하는 체계가 상대적으로 부재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행복도시락, 행복나래, 사회적기업 MBA, 사회적가치연구원 등 SK가 구축해 온 지원 플랫폼을 소개하며 “정밀한 가치 측정에 드는 높은 거래 비용은 최근 AI 기술의 발전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최 회장은 특히 “자발적 동기를 자극하는 정교한 성과 기반 인센티브 시스템이 필수적”이라며 이윤 추구를 넘어 사회적 가치 창출이 보상받는 ‘새로운 자본주의(New Capitalism)’로 전환해야 한다는 제안도 내놓았다.
SEWF와 사회적가치연구원은 이번 행사를 계기로 한국의 지난 20년간 사회적기업 생태계 발전 과정을 분석한 공동보고서를 발간했다. 보고서는 한국을 새로운 정책과 시장 메커니즘을 계속 실험하는 ‘살아 있는 실험실’로 소개했다.
게리 히긴스 SEWF 대표는 “한국의 사회적 경제 생태계는 정부에서 시작됐지만 민간과 비영리조직이 정책과 기술, 방법론을 투입하는 하이브리드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며 “개발도상국뿐 아니라 선진국에도 훌륭한 교과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행사 참석자들이 지난 12일 서울에서 열린 사회적기업월드포럼(SEWF)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CSES 제공협력사·지역사회로 이어지는 상생경영
최 회장이 사회적 가치의 반경을 국가와 글로벌 단위로 넓혀가는 사이 SK그룹 내부에서도 협력사·지역사회와 함께하는 상생 행보는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SK그룹은 지난 7월 SK하이닉스, SK텔레콤, SK에코플랜트 등 7개 계열사와 100여 개 협력사가 참여한 가운데 ‘1·2·3차 협력사 간 상생 협약’을 체결했다. 협력사의 자금 부담을 덜기 위해 대금 지급 기한을 최대 10일 이내로 단축하고, 6800억 원 규모 동반성장 펀드의 지원 대상을 2·3차 협력사까지 확대하기로 했다. 특히 반도체 생태계를 활성화하기 위해 1조4000억 원의 신규 자금을 투입하기로 했다.
지역사회 지원도 이어졌다. SK그룹은 지난달 집중호우로 큰 피해를 입은 거제·통영 등 남부 지역에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20억 원의 성금을 기탁했다. SK이노베이션은 질병·장애 등으로 가족을 직접 돌보는 가족돌봄아동을 대상으로 진로탐색 캠프 ‘낙낙투어’를 운영하며 교육비와 심리치료, 문화체험을 지원하고 있다.
SK텔레콤은 AI 기술을 사회적 가치 창출에 활용하고 있다. 자체 AI 파운데이션 모델 ‘A.X K2’로 독립유공자 1만8776명의 활동 기록을 분석하고 이를 위치 데이터와 결합해 시민들이 선열의 발자취를 직접 걷고 뛰며 기억하는 ‘기억하길’ 캠페인을 만들었다. 최 회장이 강조해 온 AI를 통한 사회문제 해결이 실제 사회공헌 활동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숫자로도 증명된다. SK그룹은 지난해 총 32조2000억 원의 사회적 가치(SV)를 창출했다고 밝혔다. 측정을 시작한 2018년(16조 원) 대비 두 배 가까이 늘어난 규모로, 누적 창출액은 155조 원에 달한다.
SK그룹 관계자는 “앞으로도 협력사, 지역사회와 함께 성장하는 상생경영을 흔들림 없이 이어가겠다”며 “사회적 가치를 키우는 노력이 실제 성과로 이어지도록 계속 힘쓰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