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은 단순한 경기 변동이나 정책 변화를 넘어 심층적 불확실성의 시대를 직면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ESG는 당위적인 사회적 책임이라기보다 위기 상황에서도 비즈니스를 지속하게 만드는 회복탄력성 전략이 되고 있다.
[한경ESG] 스페셜 리포트 - 불확실성의 시대, 생존 전략이 된 ‘ESG’
2026년 4월 12일, 이스라엘의 공습 표적이 된 레바논 남부 도시 나바티예 지역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2026년 2월 28일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으로 촉발된 중동사태는 호르무즈해협 봉쇄와 에너지 인프라 피해를 통해 전 세계 공급망과 금융시장에 즉각적인 충격을 안겼다.
세계 원유 물동량의 약 20%, 액화천연가스(LNG)의 4분의 1이 통과하는 이 해협이 사실상 멈추면서 브렌트유는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했고, 해운·항공·제조 전 산업에서 리스크 관리가 최우선 과제로 급부상했다. 협상과 충돌이 반복되는 가운데, 5월 초 현재 미·이란은 핵농축 중단과 제재 해제, 해협 재개방을 담은 양해각서(MOU) 체결에 근접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의 휴전 소식에도 불구하고, 일부 피해는 이미 발생했으며 하방 리스크는 여전히 높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번 사태의 본질은 에너지 수송로가 외교적 협상 수단이자 군사적 압박 도구로 전환된 구조적 변화에 있다. 충돌이 종식되더라도 에너지 공급망의 지정학적 취약성, 물류 비용 급등, 탄소감축 계획의 지연이라는 충격은 이미 기업 경영의 현실로 자리 잡았다. 이는 특정 지역의 군사적 사건을 넘어, 에너지·공급망·금융 전반에 연쇄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시스템 리스크’다.
불확실성의 시대, ESG 없이 기업 생존이 가능한가
전쟁과 지정학적 충돌이 격화되는 시대에 ESG(환경·사회·지배구조)는 여전히 유효한가라는 질문은 이제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 지금의 질문은 오히려 이것이다. ESG 없이 기업이 생존 가능한가.
먼저 E(환경)를 위협하는 에너지 안보의 재부상이다. 이번 사태는 우리가 믿어왔던 탄소중립 로드맵에 균열을 내고 있다. 호르무즈해협의 긴장은 유가 급등을 넘어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 전반을 뒤흔들어 그간 ‘친환경 에너지로의 전환’이라는 명분에 집중했던 기업들은 이제 ‘에너지 안보’라는 차가운 현실에 직면했다. 단기적으로는 화석연료 의존도가 일시적으로 상승하며 탄소감축 목표 달성이 지연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이번 사태는 재생에너지와 수소 경제로의 전환이 단순히 환경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특정 지역의 정치적 리스크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국가적·기업적 생존 전략임을 다시 한번 각인시켰다.
둘째, 공급망 인권과 ‘지정학적 리스크’의 재조명이다. 공급망의 의미 자체가 변화하고 있다. 그동안ESG의 ‘S(사회)’가 주로 노사관계나 안전 보건에 머물렀다면, 이제는 공급망 전체의 지정학적 리스크가 핵심 과제가 되었다. 현재와 같은 지정학적 충돌 상황에서는 공급망의 ‘지속 가능성’이 곧 ‘운영 가능성’과 직결된다. 중동 지역의 불안정은 원자재 수급 차질과 물류 비용 상승으로 이어지고, 이는 제품 가격 상승과 소비자 부담으로 전이된다. 동시에 분쟁 지역과 연계된 공급망에서는 인권 리스크와 노동 환경 변화에 대한 관리 요구도 더욱 강화되고 있다. 이제 기업은 단순히 ‘어디서 조달하는가’를 넘어, 그 공급망이 위기 상황에서도 유지 가능한 구조인가를 함께 관리해야 하는 단계에 진입했다.
셋째, '시나리오 경영'과 이사회의 전문성 부상이다. 중동 사태와 같은 ‘심층적 불확실성(deep uncertainty)’ 이벤트는 기업 지배구조의 역할을 재정의한다. 이제 이사회는 재무제표를 승인하는 역할을 넘어,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정하고 대응 체계를 점검하는 리스크 컨트롤타워가 되어야 한다. 지정학적 위기를 관리하지 못하는 거버넌스(G)는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다. 불확실성이 상수가 된 시대에 기업의 지배구조는 변화하는 규제와 지정학적 변수를 즉각 경영 전략에 반영할 수 있는 민첩성(agility)을 갖추어야 한다.
이러한 민첩성의 핵심은 ‘예측 불가능성’을 ‘관리 가능한 변수’로 전환하는 역량에 있다. 특히 현재의 중동 사태처럼 불확실성이 큰 복합 위기 상황에서는, 단일한 전망에 의존하기보다 발생 가능한 경로를 다각도로 분석하여 각 상황에 맞는 대응 체계를 미리 설계해 두는 것이 필수적이다. 결국 ESG는 더 이상 사후적 대응이나 규제 준수의 문제가 아니라, 지속적인 충격 속에서도 기업이 스스로를 재조정하는 ‘적응 시스템(adaptive system)’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의미다.
2026년 4월 12일, 오만 무산담(Musandam)주 해안 인근 호르무즈해협을 항해하는 선박의 모습. 사진=연합뉴스3가지 시나리오와 기업의 전략적 함의
IMF는 2026년 4월 세계경제전망(WEO)에서 이번 전쟁의 불확실성이 너무 커 단일 기준선 대신 3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군사적 전황이 아니라 에너지 공급 차질의 지속 기간과 금융시장 반응을 기준으로 한 경제적 프레임워크다.
기준(Reference) 시나리오는 2026년 중반까지 교란이 해소되고 유가가 배럴당 82달러에서 안정되는 경우다. 이 경우에도 글로벌 성장률은 3.1%로 전쟁 전(3.4%)을 밑돌고 인플레이션은 4.4%로 오른다. 악화(Adverse) 시나리오는 봉쇄 장기화로 유가가 110달러까지 오르며 성장률 2.6%, 인플레이션 5.4%로 악화되는 경우다. IMF 당국자는 “현재 유가는 두 시나리오의 중간 수준”이라고 경고했다. 심각(Severe) 시나리오는 공급 차질이 내년까지 이어져 성장률이 2%대로 추락하고 인플레이션이 6%를 초과하는 경우다. 신흥국·개발도상국의 충격은 선진국의 두 배에 달하며,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는 복합적 타격을 피하기 어렵다.
세 시나리오가 공통적으로 시사하는 점은 분명하다. 어느 경로로 전개되더라도 에너지 전환의 가속, 공급망 회복탄력성 강화, 이사회 수준의 지정학 리스크 관리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 경영 과제가 된다는 것이다. 기준 시나리오조차 충격이 이미 현실화되었음을 전제하며, 악화·심각 시나리오는 준비 없는 기업에게 회복 불능의 타격을 예고한다.
충격은 에너지에 그치지 않는다. 호르무즈해협은 황·메탄올·모노에틸렌글리콜(MEG) 등 배터리·섬유·플라스틱 산업의 핵심 원자재가 통과하는 대동맥이며, 카타르 라스라판 시설 가동 중단으로 반도체 공정용 헬륨 공급도 차질을 빚고 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지연 효과(lagging effect)’다. MIT 공급망센터는 “해협이 열려도 공급망이 안정을 되찾으려면 수주에서 수개월이 걸린다”고 지적하며, 손상된 LNG 시설 복구에는 3~5년이 소요될 수 있다고 내다보았다. 따라서합의 이후에도 리스크 관리는 계속되어야 하며, 이것이 ESG 회복탄력성 전략이 단기 대응이 아닌 지속적 경영 시스템이어야 하는 이유다.
포화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 기업들
이번 중동 사태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단순한 유가 상승이나 일시적 공급망 차질이 아니다. 보다 본질적인 변화는 글로벌 기업들이 위기 대응을 넘어 운영 방식 자체를 재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거대한 혼란 속에서도 치밀한 준비와 과감한 실행으로 비즈니스 연속성을 지켜낸 기업들의 사례를 살펴본다.
사우디 아람코, ‘물리적 이중화’로 지켜낸 에너지 생명선 아람코(세계 최대 국영 석유 기업이자 에쓰오일(S-Oil)의 대주주)의 대응은 사전에 설계된 인프라 이중화의 저력을 보여준다. 지난 3월 2일, 이란의 드론이 사우디아라비아 라스타누라 정유시설을 타격하면서 페르시아만(걸프만) 동해안 수출 루트가 막혔다. 아람코는 48시간 내에 1200km의 동서 횡단 파이프라인(east-west pipeline)을 전면 가동해 원유 수송 경로를 홍해 방향으로 전환했다. 그 결과 전쟁 전 수출량의 약 70%를 유지하며 공급 연속성을 지켜냈다. 비용 효율성보다 위기 시 공급 연속성을 우선시해 미리 설계해 둔 인프라 자산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카타르항공: ‘전용 비행 회랑’을 통한 인도주의적 물류 사수 물류와 이동이 마비된 절체절명의 순간, 카타르항공은 ‘전용 비행 회랑(Dedicated Flight Corridors)’이라는 독보적인 위기 관리 솔루션을 가동하며 비즈니스 연속성을 증명했다. ‘전용 비행 회랑’이란 영공 위험도가 높은 전시 상황에서 군 당국 및 국제기구와의 협의를 통해 설정한 ‘안전이 보장된 특정 비행 경로’를 의미한다. 이는 미사일 위협 등으로부터 격리된 일종의 ‘공중 안전 터널’로, 카타르항공은 공식 성명을 통해 이 특수 경로 운영을 대외적으로 공표하며 운항의 안정성을 확보했다. 이 사례가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히 비행기를 띄운 결과가 아니라, 이를 가능케 한 선제적 거버넌스 체계에 있다. 카타르항공은 지난 2월 28일 영공 폐쇄 직후 카타르 민간항공국(QCAA)과 긴밀히 협조해 전용 비행 회랑을 신속히 확보했다. 타 항공사들이 운항 90% 가까이를 취소하는 상황에서, 카타르항공은 비행 회랑을 통해 90개 이상의 목적지로 서비스를 점진적으로 복원했다. 극한의 위기 상황에서 미리 구축된 민관 협력 시스템이 비즈니스 연속성을 지켜낸 사례다.
AWS: 물리적 파괴를 무력화한 디지털 복원력 전쟁의 파괴력은 클라우드라는 무형의 공간도 예외로 두지 않았다. 지난 3월 1일, 이란의 드론이 아랍에미리트(UAE) 2곳·바레인 1곳의 아마존웹서비스(AWS) 데이터센터를 타격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민간 하이퍼스케일러가 전시 군사 표적이 된 순간이었다. UAE 리전(데이터센터를 집약해 놓은 영역)의 가용영역 3개 중 2개가 손상됐고, 중동 지역 일부 금융·물류 서비스에 장애가 발생했다. AWS는 즉각 고객들에게 타 리전으로의 데이터 복제와 워크로드 이전을 권고했고, 글로벌 서비스는 유지됐다. 이 사태는 멀티-AZ(복수 가용영역) 설계만으로는 전쟁 같은 광역 물리 충격을 방어하기 어렵다는 교훈을 남겼고, 진정한 회복탄력성은 사전에 설계된 멀티 리전 분산 아키텍처에 있음을 실전으로 입증했다.
머스크: ‘필수 화물 우선 원칙’으로 세운 공급망 위기대응 거버넌스 세계 최대 컨테이너 선사인 머스크(Maersk)는 전쟁 발발 직후 비필수 화물 수락을 중단하고 식품·의약품을 최우선 화물로 지정하는 원칙을 즉각 공개 선언했다. 이는 경쟁사들이 일제히 운항을 중단한 것과 다른 차별화된 행보였다. MSC·CMA CGM·하팍로이드(Hapag-Lloyd) 등이 비용 절감과 안전을 이유로 단순 운항 중단에 그친 반면, 머스크는 “필수재는 어떤 상황에서도 멈출 수 없다”는 원칙하에 유럽발 화물을 제다(Jeddah)항까지 해상으로 운송한 뒤 사막을 횡단하는 트럭킹으로 걸프 지역에 배송하는 복합 루트를 즉각 가동했다. 최고영업책임자(CCO) 카르스텐 킬달(Karsten Kildahl)이 직접 고객 앞에 나서 연료 공급망을 선제적으로 재배치하는 과정을 영상으로 공개했다. 이란의 ‘비적대국 선박 통과 허용’ 발표 이후에도 “보안팀이 100% 안전하다고 판단할 때까지 해협에 복귀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공식화해 속도보다 안전과 신뢰를 우선시하는 거버넌스를 실증했다. 전쟁 발발부터 5월 현재까지 20회 이상의 공식 운영 업데이트를 발행하며, 극한의 위기에서도 원칙과 투명성이 가장 강력한 경영 자산임을 입증하고 있다.
지경학적 충돌과 심층적 불확실성 시대의 생존 전략
앞으로 기업이 직면하게 될 환경은 단순한 경기 변동이나 정책 변화를 넘어선 ‘심층적 불확실성(Deep Uncertainty)’의 시대다. 지정학적 경쟁, 기술 패권 다툼, 기후 변화와 공급망 재편이 얽히며 기업 전략은 전례 없이 복잡해지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ESG는 더 이상 당위적인 사회적 책임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번 중동 위기에서 목격했듯, ESG는 극한의 리스크 속에서도 비즈니스를 지속하게 만드는 최종적인 ‘회복탄력성(Resilience) 전략’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번 사태에서 살아남은 기업들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위기를 사후에 대응한 것이 아니라, 사전에 시스템으로 설계했다는 점이다.
특히 이번 사태는 에너지와 물류의 충격이 배터리·반도체·식량까지 산업 전 영역으로 확산되는 복합 충격의 구조를 드러냈다. 이는 우리 기업들에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앞으로의 전략은 단순한 공시 대응을 넘어 지정학적 리스크 관리와 공급망 회복탄력성 확보를 포함하는 경영 전략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특정 지역에 편중된 원자재 조달 구조를 재점검하고, 대체 물류 경로를 선제적으로 확보하며, 핵심 소재의 전략적 재고를 관리하는 체계 구축이 시급하다.
또한, 개별 기업의 대응을 넘어 산업 생태계 전체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MIT 보고서가 지적했듯, 공급망 파트너와의 데이터 공유와 협력 플랫폼 참여는 위기 상황에서 리스크를 분산하고 생산 연속성을 지키는 가장 강력한 방어막이 된다.
결국 전쟁의 시대에도 ESG는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의미는 더욱 실전적으로 확장되고 있다. 지속가능경영은 환경 전략을 넘어, 지경학적 파고 속에서 기업의 장기적인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경영 프레임워크다. 불확실성이 상수가 된 시대, 준비된 회복탄력성만이 기업의 생존을 담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