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수저 출신 '비운의 2인자'…리커창 中 전 총리 사망
올해 3월 퇴임한 리커창 전 중국 국무원 총리가 27일 타계했다. 향년 68세.

27일 중국 관영 매체인 CCTV는 “상하이에서 휴식 중이던 리커창 동지가 26일 갑작스러운 심장병이 발생했고, 구조에 전력을 다했지만 27일 0시10분 상하이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리 전 총리는 올해 3월 열린 ‘양회(兩會·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와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총리직을 놓고 정계를 떠났다. 이후 두문불출하던 리 전 총리가 7개월만에 사망 소식을 전한 것이다.

리커창은 1955년 7월생으로, 안휘성 출신이다. 29대1의 경쟁률을 뚫고 베이징대 법대에 합격했고, 졸업할 때는 법학과 우수생 4명중 한명으로 대표 수상을 했다. 졸업 후 베이징대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서기로 진로를 택하면서 현실정치에 발을 들였다. 1993년에 38세의 나이로 공청단의 최고위직인 중앙서기처 1서기(장관급)로 승진했다. 과거 공청단 제1서기를 지냈던 후진타오의 총애를 받았고, 리커창을 공청단 1서기로 승진시킨 것도 후 전 주석으로 알려져있다.

후 전 주석의 전폭적인 지원아래 그는 지방정부에서 정치경력을 쌓아 나갔다. 1998년 43세의 젊은 나이에 허난성 성장으로 자리를 옮겨 행정경험을 쌓기 시작했고, 2005년부터 2007년까지는 랴오닝성 서기로 근무했다. 이 시기 리커창은 차기 국가주석 후보로 거론되는 등 대내외에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후 전 주석도 리커창을 자신의 뒤를 이를 후계자로 지목하고 강력한 지지를 보냈다. 시진핑은 혁명원로인 시중쉰 전 총리의 아들로 이른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지만, 리커창은 '흙수저' 출신으로 총명한 두뇌와 빼어난 언변으로 최고 지도자 반열에 오른 인물이라는 점에서도 주목받았다.

하지만 2007년 제17차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차기 국가주석직은 원로그룹과 상하이방이 지지했던 시진핑 현 주석에게 돌아갔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시 주석을 서열 6위 상무위원에, 리커창을 서열7위에 앉혔고, 시진핑은 국가부주석을 꿰차면서 차기 국가주석을 예약한 것이다. 당시 상하이방과 공청단의 파벌 싸움이 격렬했고, 태자당인 시 주석의 대안으로 떠오른 영향이었다.

리커창은 2013년 시 주석이 최고지도자가 될 때 2인자인 국무원 총리직에 올랐다. 시 주석 집권 1~2기 10년간 총리를 맡아 중국 경제 정책을 총괄했다. 시장주의자로 평가받는 리커창은 시 주석의 1인 지배체제가 강화된 상황에서도 결정적 시기마다 소신 발언을 해 일반 시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작년 4월 코로나19 확산과 엄격한 방역 통제로 중국의 경제수도 상하이 등이 전면 봉쇄돼 경제가 충격을 받자 “과도한 방역으로 물류가 차질을 빚고, 농업 인력과 농자재 이동 통제로 곡물 수확이 방해받아서는 안 된다”고 밝힌 게 대표적이다.

리커창은 또 ‘탈빈곤사회 실현’을 주장한 시 주석의 발언에 대해서도 소신 발언으로 맞섰다. 중국이 ‘샤오캉(의식주 걱정 없이 풍족) 사회’를 이룩했다는 시 주석의 선언에 대해 리커창은 “지금 중국은 아직 6억명의 월 수입이 1000위안(약 19만원)에 불과하다”고 반박한 것이다. 중국이 도달해야 할 탈빈곤사회의 실현은 아직 멀었다는 게 그의 소신이었다. 하지만 집단지도체제가 약화하고 시 주석에 권력이 집중되면서 리 전 총리의 영향력은 갈수록 약해졌다. 시 주석도 리 전 총리와 거리두기를 했고, 경제 정책에서 리 전 총리를 배제하면서 ‘리코노믹스’를 무력화시켰다.

존재감을 잃어가던 리커창은 지난해 다시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시 주석 3연임을 앞두고 ‘리커창 대망론’ 제기되면서 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중국 경제가 충격을 받으면서 ‘경제통’인 리 전 총리가 시 주석의 뒤를 이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집권 10년 동안 사실상 모든 권력을 틀어 쥔 시 주석은 3연임에 성공했고, 리커창은 올해 3월 리창 총리에게 자리를 넘기고 퇴임했다. 그는 송별사로 “사람이 하는 일은 하늘이 보고 있다(人在做天在看)”는 말을 남겼다.

베이징=이지훈 특파원/신정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