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한 공급망은 최저가 중심의 구매에서 벗어나 협력사의 기술·품질 역량을 높이고, 공급망 전반의 안정성과 회복력을 함께 키우는 데서 출발한다. 기업의 투자와 ODA·민관협력이 현지 생산자의 자립과 실질적인 환경·인권 성과로 이어질 때, 공급망은 비용 절감을 넘어 함께 성장하는 경쟁력이 된다.
[한경ESG] 포스트 ESG 시대의 공급망 전략 ⑤-끝
베트남의 고추 농가가 한국 식품기업의 공급망에 들어오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좋은 종자만으로는 부족하다. 재배기술과 품질관리 역량, 안정적인 판로, 현지 생산자와의 신뢰가 함께 갖춰져야 한다.
CJ그룹과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베트남에서 추진한 농촌개발 사업은 농가의 생산역량 강화와 기업의 안정적인 원료 조달 기반 구축을 하나의 과제로 연결한 사례다. 생산자와 기업을 잇기 위해서는 교육과 가공시설뿐 아니라 지역사회의 협력도 필요했다.
이 사례의 의미는 일방적인 지원에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현지 생산자가 시장에 진입할 기반을 마련하면 기업도 원료 조달처를 다변화하고 공급망의 안전성을 높일 수 있다. 물론 사업의 성과를 단기간에 단정하기는 어렵다. 사업이 종료된 뒤에도 품질과 거래관계가 유지되고 생산자의 자립 기반이 유지되느냐가 지속가능성을 가늠하는 기준이다.
구매 기준, 최저가에서 공급망 역량으로
기업의 구매 경쟁력은 오랫동안 가격·품질·납기로 평가돼 왔다. 그러나 협력사가 설비와 인력에 투자할 여력을 잃으면 오늘의 단가 인하는 내일의 품질 저하와 공급 차질로 돌아올 수 있다. 환경·인권 기준을 계약서에 명시하는 일과 협력사가 그 기준을 실제로 준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중요한 것은 지원 규모 자체가 아니라, 그 투자가 가치사슬 전반의 생산성과 회복력을 얼마나 높이는가에 있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가 경영의 주요 기준으로 자리 잡으면서 글로벌 소비재 기업들은 원재료 생산 단계부터 공급망을 재점검하고 있다. 네슬레는 베트남 등 커피 생산지에서 농가 교육과 재생농업 전환을 지원하며 장기적인 원료 조달 기반을 다져 왔다. 유니레버는 인도네시아에서 팜유 소농의 교육과 공급망 추적가능성 강화를 지원해 왔다. 두 기업의 사례는 환경 기준을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생산자가 이를 충족할 수 있도록 역량과 여건을 함께 조성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제조업에서는 기술과 품질, 설비 역량이 핵심이다. 협력사의 제조 역량이 최종 제품의 품질과 경쟁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의 스마트공장 지원사업은 중소 제조기업의 공정 개선과 디지털 전환을 돕는 대표적 사례다. 참여기업의 생산성과 품질이 개선된 성과가 보고돼 있지만, 이를 모든 기업에 동일하게 나타나는 효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 주목할 점은 구매기업이 축적한 기술과 경험을 협력사의 생산 현장에 이전해 제조 역량을 높이는 방식이다.
ESG 경영의 핵심축인 공급망 탄소 전환 역시 기업 간 협력이 성패를 가르는 부분이다. 현대차·기아가 2025년 참여한 공급망 탄소감축 상생협약은 1차 협력사에 대한 지원이 2차 협력사의 설비 개선으로 이어지도록 설계됐다. 협약 체결 자체를 탄소감축 성과로 볼 수는 없다. 다만 공급망의 탄소 대응을 협력사에 대한 자료 제출 요구에 머물게 하지 않고, 설비 개선과 공통 투자로 확장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글로벌 생산망의 빈틈, ODA와 민관협력으로 메우다
공급망 경쟁력은 원재료에만 달려 있지 않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의 기술도 생산과 품질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로 작용한다. KOICA와 HD현대 계열사 등이 참여한 베트남 조선용접 인재양성사업은 현지 산업에 필요한 기술인력을 키우는 협력 모델이다. 교육이 실제 고용과 산업 경쟁력으로 이어지는지는 계속 지켜봐야 하지만 개발협력과 기업의 인력 수요를 연결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개발도상국의 생산자와 중소기업이 글로벌 시장에 참여하려면 기술과 금융, 물류, 품질관리, 구매계약 등 여러 조건이 함께 갖춰져야 한다. KOICA의 포용적 비즈니스 프로그램(IBS)은 기업의 사업모델과 현지의 개발 과제를 연결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 혼합금융도 공공·개발금융과 민간자본을 결합해 민간투자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을 분담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다만 분명히 해야 할 원칙이 있다. 공적개발원조(ODA)의 목적은 특정 기업의 조달비용을 보전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에 지속가능한 개발성과를 남기는 데 있다.
유럽연합(EU)의 지속가능성 공시·실사 제도는 이른바 ‘옴니버스’ 간소화 조치를 거치며 적용 범위와 기업의 부담도 완화됐다. 규제가 일률적으로 강화되고 있다고만 보기 어려운 이유다. 그렇다고 공급 차질과 품질 문제, 탄소 정보의 정확성, 인권 위험을 관리해야 할 경영상 필요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기업은 협력사 평가율이나 인증 취득률 같은 관리 지표를 넘어 불량률과 납기 준수율, 탄소감축 실적, 거래관계의 지속성은 물론 현지 생산자의 소득 변화까지 살펴 실질적인 성과로 평가해야 한다.
지난 네 차례의 연재에서 살펴본 공급망 실사와 탄소 데이터, 플랫폼과 관리체계는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모인다. 위험을 확인했다면, 이제 누구와 어떤 역량을 함께 쌓을 것인가. 소비재 기업의 원료를 생산하는 농가와 제조업의 부품사, 해외 현장의 기술인력은 서로 다른 위치에 있지만 모두 공급망 경쟁력을 구성하는 주체의 일부다. 가장 싼 공급망이 언제나 가장 강한 공급망은 아니다. 지속가능한 공급망은 ‘누구에게서 살 것인가’를 넘어 ‘누구와 함께 성장할 것인가’에서 비로소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