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 유효기간이 6개월 안 남은 걸 알았어요, 몰랐어요? Yes or No로만 답하세요.”
싱가포르 창이공항 입국심사대에서 받은 질문이다. 여권 유효기간을 확인하지 못해 입국이 거부될 뻔했다. 그때 깨달았다. 여권은 단순히 도장을 찍는 수집품이 아니라, 그 안의 축적된 데이터를 통해 신분과 이동 이력을 지속적으로 증명하는 수단이라는 교훈을 얻었다.
이제 이 원칙은 사람이 아니라 제품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2027년 2월 18일부터 유럽연합(EU)에 판매되는 모든 전기차·산업용 배터리(2kWh 초과)는 ‘배터리 여권’이라는 전자 신분증 없이는 시장에 진입할 수 없다.
디지털제품여권(Digital Product Passport, DPP)은 제품에 부착된 QR 코드로 원료 구성, 탄소발자국, 재활용 원료 비중, 책임광물 조달, 생산 이력을 표준화된 데이터로 제공하는 ‘제품의 전자 신분증’이다. 그 첫 대상이 바로 배터리다. 세계 최초의 의무 DPP인 배터리 여권은 EU 배터리규정(2023/1542) 제77조에 따라 2027년 2월 부터 전기차(EV)·산업용 배터리에 의무화된다.
지난 7월 19일에는 이 제도의 핵심인 DPP 중앙 등록시스템이 가동됐고, 팔리지 않은 의류·신발의 폐기를 금지하는 규정도 대기업을 대상으로 시행됐다. ‘법조문’이던 제도가 이제는 ‘작동하는 인프라’로 바뀐 것이다.
배터리는 전체 제도의 ‘시험대’다. 배터리 여권을 규정한 에코디자인규정(ESPR, 2024/1781)은 섬유·가구·타이어·철강·알루미늄으로 대상을 넓혀가며, 철강은 이미 2026년 위임법 채택, 2028년경 시행이 예고돼 있다. 즉 배터리에서 검증된 데이터 구조·접근권한·집행 방식이 다른 산업의 표준이 된다는 의미다. 게다가 배터리는 관련 의무가 이미 단계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탄소발자국 선언은 EV용이 2025년 2월, 산업용이 2026년 2월부터 의무화됐고, 2029년 2월부터는 탄소집약도 상한을 넘는 배터리는 아예 EU 시장에 팔 수 없다. 공시를 넘어 ‘시장 진입 자격’이 된 것이다.
검증된 데이터가 시장 경쟁력 만든다
핵심은 DPP가 ‘공시 서류’가 아니라 ‘제품에 붙는 검증된 데이터’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데이터가 정말 기업가치와 가격 경쟁력으로 이어질까? 인접 시장인 저탄소 철강이 이미 답을 보여준다.
유럽에서 수소 기반 직접환원철(H2-DRI)로 만든 저탄소 철강은 일반강 대비 톤당 20~30%, 그린 열연강판 기준 톤당 160~200유로의 프리미엄에 거래된다. 결정적인 대목은 ‘검증’의 유무다. 제3자 검증을 받은 탄소집약도 데이터는 최고 프리미엄을 받는 반면, 기업이 스스로 선언한 감축은 프리미엄이 30~50% 낮다. 즉 ‘탄소를 줄였다’는 주장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검증된 데이터 그 자체가 가격 협상력을 만든다.
이 메커니즘을 배터리 산업에 제도로 제도화한 것이 배터리 여권이고, 그 한복판에 한국 기업이 있다. 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 3사는 중국 CATL과 함께 글로벌 EV 배터리 시장의 80% 이상을 차지하며 여권 의무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대응은 빨랐다. LG에너지솔루션은 글로벌 배터리 얼라이언스(GBA)의 배터리 여권 파일럿 컨소시엄을 주도하고, 지난해 8월에는 현대차·기아와 3사가 공동 태스크포스를 꾸려 국제표준에 부합하는 배터리 품질 이력 추적 시스템을 구축했다. EU는 전 세계 배터리 시장의 약 17%를 차지하며 2030년 26%까지 커질 전망이어서, 여권 대응력은 곧 유럽 시장 접근권과 직결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법은 시행됐다가도 폐지될 수 있지 않나?’ 트럼프 행정부의 기후공시 규제 후퇴를 지켜본 투자자라면 당연한 반문이다. 그러나 DPP를 단순한 환경 규제가 아니라 EU의 ‘산업정책’으로 읽으면 그림이 달라진다.
EU는 넷제로산업법(NZIA)·핵심원자재법(CRMA)으로 이어지는 그린딜 산업계획을 통해, 미국은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중국의 제조 굴기에 맞선 ‘개방적 전략적 자율성’을 공식 목표로 내걸고 있다. 이는 자신들이 청정기술·배터리의 순수입국이라는 현실 인식 아래, 수입 의존을 낮추고 역내 산업 경쟁력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인도·중국·브라질·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은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기후 대응을 가장한 녹색 보호무역’이자 차별적 무역장벽으로 규정하고 세계무역기구(WTO)에서 문제를 제기해 왔다. 최빈국 예외조차 두지 않았다는 점도 이 해석에 힘을 싣는다. 결국 투명하고 검증 가능한 공급망 데이터를 갖춘 기업에는 유리하고, 불투명한 수입 공급망에는 사실상 진입 비용을 부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DPP를 ‘언젠가 사라질 규제’가 아니라 ‘대응해야 할 상수(常數)’로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투자자가 주목해야 할 것은 ‘검증된 데이터’
그렇다면 투자자가 스스로 물어야 할 질문은 ‘누가 공시를 예쁘게 잘하는가’가 아니라 ‘누가 검증된 데이터를 협상력으로 바꾸는가’여야 한다. 검증 가능한 데이터 인프라를 선제 구축한 기업은 가격 프리미엄과 수주 가능성을 높이는 한편, 그렇지 못한 기업은 2029년 탄소집약도 상한을 넘는 시장 진입 제한이라는 위험에 직면할 수 있다.
특히 협력사의 스코프(Scope) 2 배출량은 곧 완성품 기업의 스코프 3 배출량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검증된 저탄소 데이터를 가진 소재·부품사는 공급망에서 수주 경쟁력을 확보할 가능성이 높다. 데이터 수집·검증 솔루션과 이력추적 소프트웨어 기업 역시 순환경제 규제의 직접적인 수혜 영역이다.
‘비재무’로 분류되는 순환경제·공급망 데이터가, 이제는 순이익과 지속가능한 자기자본이익률(ROE)을 가르는 재무 시그널로 변화하고 있다. 앞으로는 여권이 없으면 제품을 판매할 수 없고, 검증된 데이터가 기업의 가치와 값을 매기는 시대다. ESG 투자자라면 친환경이라는 구호보다 제품에 붙은 검증 데이터를 실제 시장 경쟁력과 수익으로 연결할 수 있는 기업을 선별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