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ESG] 기고
[특별기고] 농업 희생을 전제로 한 ‘CPTPP’ 가입 논의 안 된다


정부가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을 위한 사회적 논의와 의견수렴에 들어가면서 농업 현장의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최근 예정됐던 농업계 간담회가 반발 속에 파행을 빚은 것도 그만큼 현장의 우려가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농촌 현장에서 농업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요즘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있다. “이제 또 뭘 열어야 합니까?” CPTPP 가입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농업인들의 마음이 무겁다. 오랜 시간 농업 현장을 지켜본 조합장으로서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농민들은 개방을 몰라서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수많은 FTA를 겪어봤기 때문이다. 시장이 열릴 때마다 농민들은 ‘국익을 위해 감수해야 할 몫’이라며 한발 물러섰다. 새로운 협정이 체결될 때마다 정부는 피해 대책을 약속했고, 농민들은 그 약속을 믿고 다시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현장의 체감은 달랐다. 농산물 가격은 오르내림이 심했고 생산비는 계속 높아졌다. 비료와 농약, 농기계와 인건비까지 농사에 들어가는 비용은 해마다 늘었다. 반면 농산물 가격이 생산비만큼 따라주지 않는 해에는 그 부담을 고스란히 농민이 떠안아야 했다. 그래서 CPTPP라는 이름이 다시 등장했을 때 농민들이 먼저 걱정하는 것은 관세 몇 퍼센트가 아니다. 바로 “이번에는 우리 농업을 얼마나 지켜줄 것인가”이다.

국가의 이익을 위해 농업은 얼마나 희생해야 하나

CPTPP가 국가경제 차원에서 필요할 수 있다는 점은 이해한다. 세계 각국이 공급망을 재편하고 새로운 통상질서를 만들어가는 상황에서 우리만 변화의 흐름을 외면할 수는 없다. 수출시장 확대와 경제안보를 위한 선택도 필요하다. 그러나 국가 전체의 이익을 위해 농업이 또다시 희생해야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우리 농촌은 이미 고령화와 인구감소라는 큰 파도를 맞고 있다. 농사를 지을 사람이 줄고 농지도 계속 감소하고 있다. 여기에 농축산물 수입 의존도까지 높아지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시장을 더 개방한다면 우리 농업이 과연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냉정하게 살펴봐야 한다.

농업은 자동차나 반도체처럼 필요할 때 생산라인을 다시 세울 수 있는 산업이 아니다. 농민이 농사를 포기하고 농지가 사라지면 생산기반을 다시 회복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더구나 식량은 국민의 생명과 직결된 문제다. 국제분쟁이나 기후위기, 이상기후로 세계 식량 공급망이 흔들릴 때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결국 우리 땅에서 생산되는 먹거리다.

그렇다면 정부는 CPTPP 가입 논의에 앞서 “추가 개방으로 피해가 발생한다면 이번에는 무엇으로, 어떻게 우리 농업을 지킬 것인가?”라는 질문에 농민들에게 먼저 답을 해야 한다.

농업인들이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보상이나 일회성 지원이 아니다. 농업에서 미래의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국가가 책임 있게 농업을 보호하고 육성해 달라는 요구다. 시장이 더 열리더라도 농민들이 생산을 포기하지 않고 농촌을 떠나지 않도록 강력한 농업 보호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농가소득을 안정시키는 제도를 획기적으로 강화하고, 농산물 가격과 생산비 변동에 대응할 수 있는 실질적인 경영 안전망을 갖춰야 한다.

사회적 안정망과 과감한 투자 필요

경쟁력 있는 농업에는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 스마트농업과 기계화, 품종개발, 유통혁신, 농식품 수출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농업이 미래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한다. 동시에 식량안보에 필요한 전략작물과 우량농지, 농업생산 기반은 시장 논리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국가가 반드시 지켜야 할 자산으로 관리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보다 후퇴하는 농업·농촌을 절대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농촌의 인구가 줄고 농업인이 고령화된다는 이유로 농업의 중요성까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농업의 기반이 약해질수록 국가의 책임은 더 커져야 한다. 농촌이 소멸하고 농업생산 기반이 무너진 뒤에는 어떤 통상협정도 식량안보를 대신해줄 수 없다.

따라서 CPTPP 가입 논의는 단순히 ‘얼마나 더 시장을 열 것인가’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개방의 시대에 대한민국 농업을 어떻게 지키고, 어떻게 미래산업으로 키울 것인가’에 대한 국가적 청사진이 함께 제시돼야 한다.

농민의 목소리를 듣는 과정도 형식적인 절차가 되어서는 안 된다. 농업인들은 지금보다 나은 농업, 젊은 세대가 돌아올 수 있는 농촌, 열심히 일하면 정당한 소득을 얻을 수 있는 농업을 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평생 일궈온 농업이 내 자녀와 청년들에게도 희망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원한다.

CPTPP 가입을 무조건 반대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국가의 미래를 위한 통상정책이라면 농업도 함께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농업의 희생을 당연한 비용으로 계산해서는 안 된다. 국익은 어느 한 산업의 희생을 전제로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오늘보다 후퇴하는 농업, 오늘보다 더 어려워지는 농촌을 다음 세대에 물려줘서는 안 된다. 농민들이 다시 묻고 있다. “이번에는 정말 우리 농업의 미래까지 책임져 줄 것입니까?” 이 질문에 정부가 답해야 할 때다.

조덕현 동천안농협 조합장·농협중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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