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로앤비즈의 'Law Street' 칼럼은 기업과 개인에게 실용적인 법률 지식을 제공합니다. 전문 변호사들이 조세, 상속, 노동, 공정거래, M&A, 금융 등 다양한 분야의 법률 이슈를 다루며, 주요 판결 분석도 제공합니다.
출처: 제미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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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학에서 유래해 금융이나 자산관리 분야에서 자주 쓰이는 개념으로 ‘테일 리스크’(tail risk)가 있다. 종 모양의 정규분포 그래프를 떠올려 보면, 가운데에 흔히 발생하는 사건들이 위치하고 양쪽 꼬리(tail)엔 발생 확률은 낮지만 극단적인 사건들이 위치하게 된다. 이 꼬리 부분에 있는 사건의 위험성을 바로 테일 리스크라고 표현한다.

그러면 테일 리스크, 즉 낮은 확률의 위험은 무시해도 되는 것인가? 아니다. 오히려 다수의 위험관리 전문가들은 “낮은 확률의 위험일수록 더 진지하게 대비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강조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주 일어나는 위험엔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드물게 발생하는 위험은 “설마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겠는가”란 생각으로 대비를 미루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개인과 기업의 운명을 바꾸는 것은 대부분 이러한 테일 리스크임을 주목해야 한다.

상속설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기업가들이나 자산가들이 자신의 사후에 승계 플랜을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유언, 증여, 상속세 절감, 가업승계와 같은 문제다. 물론 모두 중요한 요소들이며,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서도 이에 대해 법률가나 로펌 등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충실하게 준비하는 것이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상속 설계엔 대부분의 사람이 예상하지 못하는 테일 리스크가 있다. 바로 본인이 더 이상 자신의 재산을 관리하거나 법률적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치매, 뇌혈관 질환, 예기치 못한 사고 등으로 판단능력을 상실하는 사례는 더 이상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설마 나에게 그런 일이 벌어질 리는 없지”, “아직은 괜찮다”, “나중에 준비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투자자가 테일 리스크를 외면하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의사능력의 리스크가 현실화됐을 때 의사능력의 흠결을 메워주고 정상적인 경제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법률적 장치가 바로 후견제도다. 우리 민법에는 과거에 금치산, 한정치산 제도라고 하여 의사능력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제도가 설계돼 있었다. 2013년 경부터 시행된 개정 민법의 후견제도는 본인의 자기결정권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정상적인 법률행위를 지원하게 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뤄져 현재까지 잘 정착돼 시행되고 있다.

성년 후견제도는 개시되는 태양에 따라 법정후견과 임의후견으로 나뉜다. 통상 성년 후견을 말하면 법정후견을 머리에 떠올릴 것이다. 후견의 개시 여부, 후견인의 선임, 후견인의 권한이 법원의 재판을 통해 결정되는 것이 법정후견이다. 이와 달리 후견을 받을 사람이 미리 자신의 후견인과 그의 업무 권한을 정해두는 것이 임의후견이다.

법정후견은 정신적 제약이 발생한 이후 법원의 개입에 의해 진행된다. 따라서 당사자 본인의 의사가 반영될 여지가 상대적으로 적다. 이에 비해 임의후견은 사건 본인의 의사에 의해 절차가 진행되기 때문에, 후견제도가 목표로 하는 사적 자치와 자기결정권 존중의 이념에 충실하게 부합하는 제도로 평가되고 있다.

후견업무 개시되면 다툼 종결?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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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로서 다수의 법정후견 관련 케이스를 진행하다 보니, 사건본인은 물론 그를 둘러싼 가족, 친지, 나아가 관련 임직원들까지 엄청난 고통을 겪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의 오너 등의 경우엔 사업의 승계 등 회사의 운영과 관련해 필연적으로 분쟁이 일어나는 경향이 있다. 고액 자산가들의 경우도 재산의 분배와 관련한 분쟁이 늘어나고 있다.

법정 후견을 위해 법원의 문을 두드리게 되면 우선 후견 개시 요건이 되는지, 즉 사무처리 능력이나 인지능력에 장해가 있는지 여부에 대해 치열하게 다투게 된다. 이 단계에서 사건본인은 법원이 정해 주는 의료기관에서 정신감정을 받아야 하고, 법원 가사조사관의 조사 절차나 법정에서 이뤄지는 당사자심문 절차에도 응해야 한다. 1심인 가정법원에서 후견이 개시되고 후견인을 선임하게 되면 그에 대해 항소심, 상고심까지 다툼이 이어져서 심판이 확정되기까지 2~3년을 훌쩍 넘기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사건이 확정돼 후견인이 업무를 개시하게 된다고 해서 다툼이 종결되는 것이 아니다. 후견인의 업무 진행과 관련해 이해관계인은 각종 요청과 이의를 제기하게 되며, 후견인은 독자적으로 후견 사무를 처리하는 게 아니라 중요한 결정에 대해선 법원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사건본인의 복리나 자기결정권이 실현되기에는 절차적으로 너무 복잡하다. 기업의 경우에는 중요한 의사 결정이 내려져야 하는데 후견인이 이를 수행하기에는 너무 벅찬 구조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로펌의 도움을 받게 된다. 그래도 신속한 결정을 내리기엔 법적 걸림돌이 너무도 많다.

임의후견, 맞춤형 설계 가능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제도가 임의후견이다. 임의후견은 장차 의사결정 능력이 저하되는 상황에 대비해 미리 후견인이 될 사람과 후견계약을 공정증서로 체결하고, 실제로 판단능력이 부족해지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법원의 임의후견감독인을 선임하는 심판과 동시에 후견이 개시된다. 즉 건강할 때 미리 준비해 두었다가 필요한 시점에 작동하는 예방적 법률장치인 셈이다.

임의후견은 본인이 신뢰하는 사람을 후견인으로 선택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후견인의 권한도 재산관리, 기업 경영, 금융자산의 관리, 부동산의 처분, 의료 및 신상 등 본인의 필요에 맞게 구체적인 내용으로 정할 수 있다. 획일적인 보호가 아니라 맞춤형 설계가 가능하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서는 2013년 민법 개정 이후 법정후견 개시 건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에 비해 아직 임의후견이 개시 건수는 미미한 편이다. 아직도 후견은 최악의 경우에 사후적으로 이용하는 제도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후견의 진정한 가치는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선택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기업가나 자산가에게 임의후견은 단순한 복지제도가 아니라 상속설계의 연속성을 확보하는 수단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유언이나 사전 증여 등을 통해 상속플랜을 실행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판단능력을 상실하는 순간 그 사이의 공백이 생길 수 있다. 임의후견은 바로 그 공백을 메워주는 제도다. 승계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임의후견을 상속설계를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