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완성차 업체인 포드와 GM이 AI 시대 전력 수요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ESS용 배터리 시장에 본격 진출하면서 한국 배터리 업계의 경쟁이 한층 치열해질 전망이다. LG에너지솔루션 등 국내 업체들 역시 미국 내 생산 인프라와 양산 경험을 바탕으로 ESS 시장 선점을 이어가기 위해 생산 확대와 설비 전환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한경ESG] ESG Now
LG에너지솔루션의 ESS 단지 /LG에너지솔루션 제공LG에너지솔루션의 ESS 단지 /LG에너지솔루션 제공
한국의 배터리 회사들이 선점했던 미국 리튬인산철(LFP) 기반 에너지저장장치(ESS) 시장에 강력한 경쟁자가 나타나고 있다. 미국 완성차 회사인 포드뿐 아니라 제너럴모터스 등이 빠르게 커지고 있는 ESS 시장 참여를 선언한 것이다.
전기차(EV) 수요 부진이 이어지자 인공지능(AI) 수요에 대응하는 전력 인프라 개발을 통해 활로를 찾는다는 포석이다. 완성차와 달리 화학 제품을 다루는 배터리 산업 특성상 양산이 쉽지 않을 것이란 의견이 많지만, 중국 기술 등을 들여와 빠르게 시장에 안착할 것이란 반론도 나온다.
양산 전 셀 생산 성공
포드는 최근 미국 미시간주 블루오벌 배터리 파크에서 LFP 배터리 생산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본격적인 양산 단계는 아니지만 자체적으로 전극 슬러리 제조(양·음극재에 용매 등을 첨가하는 과정)와 양·음극재 금속 코팅 등 양산 전 공정을 실험실이 아닌 공장에서 끝냈다. LFP 배터리 생산을 위해 연말까지 800명 이상을 추가 채용하고, 직원들이 배터리 제조 공정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지원할 방침이다. 해당 배터리는 올해 말부터 양산에 돌입한다. 내년 출시 예정인 중형 전기 픽업과 ESS 배터리 등에 사용할 예정이다. 업계는 특히 포드의 공격적인 ESS 사업 진출에 주목하고 있다.
포드는 블루오벌 배터리 파크뿐 아니라 SK온과 합작 관계 청산 과정에서 인수한 켄터키주 배터리 공장 등을 ESS 생산 거점으로 삼을 계획이다. 이미 ESS 사업에 20억 달러(3조 원)를 투자했고, 내년 말 첫 고객 인도를 목표로 연간 최소 20기가와트시(GWh)의 전력을 생산할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모건스탠리는 “포드가 수개월 내로 하이퍼스케일러(대형 AI 데이터센터 운영 기업)와 대규모 계약이 가능할 것”이라고 보는 등 시장 전망 역시 밝은 편이다.
GM 역시 ESS 사업을 본격화했다. 지난 6월 GM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언론 간담회를 열고 거치형 ESS 시장에 진출한다고 밝혔다. 전력 소비가 적은 심야 등에 전력을 저장해 고수요 시간대에 공급하는 전력망(그리드)용 대형 배터리를 개발할 계획이다.
GM의 스털링 앤더슨 최고제품책임자(CPO)는 최근 자사 블로그에서 “과거 주요 기술 전환기에는 느린 프로세서나 인터넷 속도가 걸림돌이었지만, 오늘날 혁신의 병목 구간은 에너지”라며 “대규모 전력 소비를 위한 ESS 배터리를 개발하고 우리 EV를 전력망 지원 수단으로 활용하는 조처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리치몬드밸리 배터리에너지저장시스템(BESS) 및 태양광발전소 프로젝트 3차원(3D) 예상도. 사진=아크에너지완성차의 배터리 진출 가능할까
전문가들은 포드나 GM이 LFP 기반 ESS를 제대로 만들 수 있을지 여전히 의구심을 갖고 있다. 하청업체로부터 조달받은 수만 개 부품을 조립하는 게 핵심인 자동차 산업과 달리 배터리 산업은 화학 공정에 가깝기 때문이다.
폭스바겐그룹이 최대주주(약 20%)인 스웨덴 배터리 셀 제조사 노스볼트가 결국 파산보호를 신청한 것도 수율을 잡지 못해서다. 국내 배터리 회사의 한 경영진은 “온도 등 아주 작은 노이즈에도 완전히 다른 결과물이 나올 수 있는 작업”이라며 “여러 변수에 대한 노하우를 생산 경험을 통해 쌓아야 하지만 이를 극복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린다”고 말했다.
포드와 GM도 이런 문제를 잘 알고 있다. 이들이 내놓은 해법은 외부와의 협력이다. 포드는 이런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세계 1위 배터리 회사 중국 CATL(닝더스다이)과 손을 잡았다. 블루오벌 배터리 파크는 공장 소유권과 운영은 포드가 맡지만 제조 기술은 CATL로부터 제공받는다. CATL에 라이선스 이용료를 지급하는 대가로 LFP 생산 기술이나 특허, 공정 노하우, 작업자 교육 등을 제공받을 전망이다. “미국 자본으로 만든 CATL 공장이 될 것”이란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다만 중국 배터리 산업의 미국 진출을 막고 있는 미국 정부와 정치권으로부터 제재를 당할 수 있다는 게 변수다.
공화당인 존 몰러나 하원 중국특별위원회 위원장은 올 1월 포드에 서한을 보내 CATL과 맺은 계약 내용을 공개하라고 촉구했다. 포드가 포드에너지 지분 100%를 소유하고 있지만 CATL이 의사 결정에 참여하거나 미국 공장의 운영 데이터가 CATL에 다시 넘어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GM 역시 미국의 스타트업 ‘피크에너지’와 파트너십을 맺었다. GM은 피크에너지와 함께 기존 GM 공장을 개편하거나 신규 합작 공장을 지어 ESS용 배터리를 생산하는 방안을 추진할 예정이다.
두 회사는 또 고성능 나트륨이온 배터리 개발에 집중할 방침이다. 에너지 밀도가 LFP 셀보다 낮은 대신 저온·고온에서 안정성이 높고 화재 위험이 적어 전력망 대응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핵심 원료인 나트륨염의 매장량이 풍부하고 가격이 싸 수급 비용을 크게 낮출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GM의 커트 켈티 배터리사업총괄(부사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른 경쟁사가 중국 기술을 가져와 똑같은 LFP 배터리를 만들 때 우리는 이들을 단번에 뛰어넘을 수 있는 더 우수한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GM은 양산 시점을 2028년 정도로 보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프레스노카운티 LG에너지솔루션 RWE 에너지저장시스템(ESS) 단지 사진=한국배터리산업협회전기차 부진 만회할까
ESS 사업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배터리 사업을 되살릴 사실상 유일한 카드로 꼽힌다. AI 투자 붐으로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량이 폭증하면서 부족한 전력을 적시에 공급하는 거치형 배터리의 수요가 치솟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조사업체 블룸버그 NEF에 따르면 미국 전역에서 2030년께 그리드용 배터리 수요량이 현재의 두 배 수준인 100GWh 이상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측된다.
미국 완성차사의 ESS 진출은 한국 배터리사에 큰 위협이 될 전망이다. 미국에서 LFP 배터리를 대량 생산하고 있는 회사는 LG에너지솔루션밖에 없다. 여기에 삼성SDI는 오는 4분기, SK온은 내년 양산을 목표로 준비 중에 있고, 상당량의 수주도 받은 상황이다. 사실상 한국이 미국에서 과점 체제를 구축한 상황에서 미국 완성차 회사들이 시장에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미국 내 ESS 생산은 LG에너지솔루션이 여전히 앞서 있다. 미국 내에서 중국 기업은 높은 관세와 규제 탓에 ESS를 생산할 수도, 중국에서 만들어 수출할 수도 없다.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 7월 7일부터 GM과의 합작법인(JV) 얼티엄셀즈에서 ESS용 셀 생산에 나서는 등 미국 내에서 다섯 곳의 ESS 생산 시설을 보유하고 있다. 단연 미국 내 최대 규모다.
설비 전환도 빠르게 이어지고 있다. 얼티엄셀즈는 지난 3월 ESS용 LFP 제품을 생산한다고 발표한 지 4개월 만에 생산에 돌입했다. 미국 내 배터리 인프라를 투자해 놓은 덕분에 빠른 전환이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얼티엄셀즈는 7000만 달러 규모의 설비 전환 투자를 통해 기존 EV 배터리 생산라인 일부를 ESS용 배터리 생산 라인으로 전환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7월 2일에는 미국 오하이오주의 혼다 합작법인 ‘L-H 배터리 컴퍼니’에서도 전기차 배터리 대신 ESS 배터리 셀 양산을 개시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미시간 랜싱 공장도 연내 ESS 셀 양산을 시작해 올해 연말까지 북미에서만 50GWh 이상의 생산 역량을 확보할 계획이다.
박인재 얼티엄셀즈 법인장은 “LG에너지솔루션의 첨단 배터리 기술과 테네시 임직원들의 헌신을 바탕으로 속도, 유연성, 안전, 품질, 생산성 모든 면에서 ESS 생산 체계를 성공적으로 구축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