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GX로 일본이 저탄소 전환을 선점할 경우, 한국 기업들은 글로벌 공급망 내 지위를 위협받게 된다. 현석 연세대 환경금융대학원 교수는 K-택소노미의 흑백논리를 넘어 고탄소 산업의 연착륙을 도울 업종별 전환 로드맵이 하반기 내 시급한 정책 목표라고 제언했다.
[한경ESG] 커버 스토리 - K-GX, 산업 생태계 바꿀까 인터뷰③ 현석 연세대 환경금융대학원 교수
우리나라 기업들의 전환 준비도는 어느 정도일까. 안타깝게도 현재 고탄소 제조업 비중이 높은 우리나라 기업들은 당장의 재무지표 악화와 기술 불확실성 앞에 장기 설비투자를 주저하고 있으며, 국내 금융기관들 역시 모호한 기준과 리스크 관리 체계의 한계로 인해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할 전환금융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처럼 현장의 고심이 깊어지는 가운데 한국형 녹색대전환(K-GX)에 대한 기대감은 부풀어오르고 있다.
<한경ESG>는 일본통이자 국내 최고의 에너지·기후금융 전문가인 현석 연세대 환경금융대학원 교수를 만나 일본 GX(Green Transformation) 정책이 한국 제조업과 금융시장에 던지는 시사점을 짚어 보았다. 현 교수는 “제조업 경쟁국인 일본이 저탄소 전환을 선점할 경우, 한국 기업은 글로벌 공급망 내 지위 자체를 위협받을 수 있다”고 경고하며, “K-택소노미의 흑백논리를 넘어 고탄소 산업의 연착륙을 도울 ‘업종별 전환 로드맵’과 범부처 차원의 투자 프레임 구축이 올해 하반기에 가장 시급히 추진되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 민간 자본의 유입을 이끌어내기 위해 일본 GX에서 배울 부분은 어떤 부분인가.
“한국이 일본의 GX경제이행채 사례에서 배워야 할 핵심은 정부 재정이 민간투자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이 장기 투자를 결정할 수 있도록 초기 위험을 낮추고 정책 신호를 분명히 주는 역할을 정부가 해야 한다는 점이다. 전환투자는 초기 비용이 크고 회수 기간이 길며, 기술·정책 불확실성이 높기 때문에, 민간 자본만으로는 어렵다. 따라서 정부는 보증, 세제지원, 장기 정책금융, 차액지원 등 다양한 수단을 통해 ‘국가가 장기적으로 뒷받침한다’는 신호를 시장에 제공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정책의 지속성이다. 단기 예산사업만 보고 수조 원 규모의 설비투자를 결정할 수 없다. 일본 GX는 10년 이상의 정책 시계 속에서 공공재원을 먼저 투입하고, 이를 민간투자를 유도하는 마중물로 활용했다.”
- 일본의 업종별 가이드라인이 주는 시사점은 무엇인가.
“기존 한국의 K-택소노미는 어떤 경제활동이 녹색활동에 해당하는지 기준을 마련했다는 의의가 있지만, 시장 활용 측면에서는 한계도 분명하다. 특히 철강, 석유화학, 시멘트, 조선, 전력 등 탄소집약적이지만 국가 경제에 필수적인 산업에 대해 어떤 기술과 투자 경로를 통해 저탄소 산업으로 전환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K-택소노미만으로는 금융기관이 전환투자에 자금을 공급할지 판단하기 어렵다. 일본의 업종별 전환금융 가이드라인은 단순히 녹색인가를 구분하기보다, 산업별로 현실적인 감축기술, 투자 시계, 전환경로를 제시해 기업과 금융기관이 공유할 수 있는 판단 기준을 만들었다. 한국도 K-택소노미를 기본 분류체계로 유지하되 그 위에 산업별 전환 로드맵을 결합해야 한다. 로드맵은 고탄소 산업이 어떤 조건과 경로를 충족할 때 전환금융의 대상이 되는지 보여주는 보완 장치가 되어야 한다.”
- 당장 재무지표가 악화할 수 있다는 이유로 고탄소 기업의 GX 설비 투자가 막혀 있다. 국내 금융기관들이 왜 나서지 않고 있나.
“국내 은행들이 전환금융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한 의지 부족이 아니라, 기존 여신 심사체계가 전환투자의 특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소환원제철, 배터리에너지저장장치(BESS), 탄소포집, 저탄소 원료 전환과 같은 투자는 초기 비용이 크고 회수 기간이 길며 기술 불확실성도 높다. 단기 재무지표와 담보가치만 보면 오히려 위험한 대출로 보일 수밖에 없다. 일본 주요 금융기관들이 엔지니어와 기술 전문가를 활용해 감축기술의 실현 가능성, 투자 일정, 탄소감축 효과를 검토하는 것은 전환금융 심사가 단순한 금융심사에서 기술·산업·기후 리스크를 함께 보는 복합심사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도 은행 내부의 기술심사 역량을 높이고, 외부 전문기관과 연계한 검증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동시에 정책금융은 일본 정책투자은행(DBJ)처럼 보증, 신용보강, 후순위 참여, 손실 우선 부담 등을 통해 민간 은행이 감당하기 어려운 초기 위험을 낮춰주어야 한다.”
- 일본 GX가 빠르게 달성된다면, 글로벌 공급망 내에서 한국 제조 대기업들이 받게 될 타격은.
“앞으로 제조업 경쟁력은 가격, 품질, 납기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배터리 규제, 공급망 실사, 글로벌 RE100(재생에너지 100% 사용) 요구처럼 제품 생산 과정의 탄소배출이 직접적인 거래 조건이 되고 있다. 특히 철강, 화학, 자동차, 배터리, 조선처럼 한국과 일본이 경쟁하는 산업에서는 저탄소 소재와 부품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능력이 곧 시장 접근성으로 연결된다. 일본 기업들이 정부의 GX 지원을 바탕으로 저탄소 철강, 저탄소 화학소재, 친환경 부품 전환을 먼저 달성한다면, 한국 기업은 기존 품질과 생산능력만으로 글로벌 공급망 내 지위를 유지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한국 기업의 전환이 늦어질 경우 영향은 환경평가 낙제에 그치지 않고 수출계약, 조달시장 진입, 글로벌 완성차·빅테크와의 거래관계, 투자유치, 기업가치 전반으로 확산될 수 있다.”
- 당장 돈이 투입되어야 하는 가장 시급한 GX 과제는 무엇인가.
“가장 시급한 과제는 첨단산업이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저탄소 전력과 전력망을 확보하는 것이다. 반도체, 배터리, 데이터센터, 인공지능(AI) 등 미래 먹거리 산업은 전력 수요가 크고, 앞으로는 전력의 안정성뿐 아니라 탄소배출 수준도 경쟁력의 기준이 된다. CBAM, RE100, 글로벌 공급망 규제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저탄소 전력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면 한국 첨단산업의 수출 경쟁력과 투자유치 여건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산업·에너지 당국은 송전망·변전소 투자를 앞당기고, 기업의 재생에너지 직접구매계약(PPA)과 무탄소 전력 조달 수단을 확대해야 한다. 동시에 원전과 재생에너지를 대립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안정적 공급과 탄소감축을 함께 달성하는 전원믹스로 설계해야 한다.”
- K-GX에 꼭 포함해야 할 핵심 지표는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기업이 신뢰할 만한 감축목표와 감축경로를 갖고 있는지다. 즉 기업이 2050년 탄소중립 같은 장기 목표만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2030년·2035년 중간 목표, 적용할 기술, 필요한 설비투자, 예상 감축량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여기에 실제 감축 성과, 전환투자 규모, 저탄소 제품 생산능력을 함께 보아야 한다. 그래야 GX가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기업의 경쟁력과 연결되는지 평가할 수 있다. 한국형 전환금융 가이드라인을 구체화하면서 철강, 석유화학, 시멘트, 자동차, 조선, 전력 등 주요 업종별로 어떤 감축경로가 신뢰할 만한지, 어떤 투자를 전환투자로 인정할 것인지, 금융기관은 무엇을 심사해야 하는지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 또한 기업의 감축목표, 기술경로, 투자계획, 외부검증, 사후 성과공시를 하나의 체계로 연결해야 한다.”
- 관치 금융의 오랜 관행 속에서 정책당국이 바꾸어야 할 소통 방식이 있다면.
“한국 금융당국은 ‘전환금융을 늘리라’는 지시형 메시지가 아니라, ‘어떤 기준을 지키면 책임 있게 전환금융을 할 수 있는가’를 제시해야 한다. 일본 금융청은 2022년 ‘기후 관련 리스크 관리 및 인게이지먼트’ 감독지침을 통해 금융기관이 기후리스크를 관리하면서도 고객 기업의 전환을 지원하도록 기준과 사례를 제시했다. 핵심은 고탄소 기업을 단순히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금융기관이 기업과의 인게이지먼트를 통해 전환계획, 기술경로, 감축목표, 투자계획을 점검하도록 유도한다는 점이다. 한국도 전환금융을 단순한 대출 확대가 아니라 책임 있는 심사와 사후관리 체계로 설계해야 한다. 또한 은행이 합리적 기준에 따라 심사하고 지속적으로 관리했다면, 일부 부실만을 이유로 과도한 책임을 묻지 않는 감독상 안전장치도 필요하다.”
- 성공적인 GX를 이끌기 위해 정부부처가 해야 할 일은.
“전환금융은 금융정책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산업부는 업종별 기술경로와 산업경쟁력 전략을 제시해야 하고, 환경부는 감축목표와 성과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금융당국은 금융기관의 심사·공시·리스크 관리 기준을 제공하고, 재정당국은 세제지원, 보증, 정책금융, 재정투입을 결합해야 한다. 문제는 한국에도 개별 정책은 존재하지만, 하나의 일관된 투자 신호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GX추진기구는 민간투자 촉진, 금융지원, 탄소가격제 운영, GX 허브 기능을 제도화해 관련 정책을 실행 단계에서 연결하려는 시도다. 한국도 단순한 부처 간 협의체를 넘어 산업별 전환 로드맵, 전환금융 인정 기준, 정책금융 지원, 민간금융 유인, 감축 성과 평가를 통합적으로 조정하는 범부처 실행체계가 필요하다. 한국형 GX 거버넌스는 부처별 정책을 하나의 투자 프레임으로 묶고, 전환금융을 국가 산업전략의 중심에 두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