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ESG] ESG Now
HD현대는 5월21일 미국에서 원자력 혁신 기업 테라파워와 나트륨 원자로 공급에 대한 기본 합의서를 체결했다. (왼쪽부터) 원광식 HD현대중공업 해양에너지사업본부장, 크리스 르베크 테라파워 최고경영자(CEO)
HD현대는 5월21일 미국에서 원자력 혁신 기업 테라파워와 나트륨 원자로 공급에 대한 기본 합의서를 체결했다. (왼쪽부터) 원광식 HD현대중공업 해양에너지사업본부장, 크리스 르베크 테라파워 최고경영자(CEO)
탄소중립과 인공지능(AI) 시대가 동시에 도래하면서 전 세계 에너지 산업의 질서가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태양광과 풍력 같은 재생에너지가 확대되고 있지만, 간헐성 문제와 폭증하는 전력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커지고 있다. 소형모듈원전(SMR)이 차세대 에너지원으로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이유다.

HD현대중공업이 미국 테라파워의 나트륨 원자로 핵심 설비 제작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것은 단순한 기자재 공급 계약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조선업을 기반으로 성장한 HD현대가 미래 에너지 산업의 핵심 플레이어로 도약하는 신호탄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HD현대, 테라파워 SMR 주기기(RES) 수주

HD현대는 지난 5월 21일 HD현대중공업이 테라파워와 나트륨 원자로 공급에 대한 기본 합의(FA)를 체결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HD현대중공업은 테라파워가 개발 중인 차세대 원전의 핵심 설비를 제작·공급하는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배경에는 정기선 HD현대 회장과 빌 게이츠 테라파워 창업자가 수년간 이어온 전략적 협력이 있다. HD현대는 2022년 테라파워에 3000만 달러를 투자하며 SMR 사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이후 두 사람은 미국과 한국, 스위스 등에서 지속적으로 만나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특히 지난해에는 나트륨 원자로 상업화를 위한 제조 공급망 구축 협약을 체결하고 약 1년간 제조 타당성과 가격 경쟁력, 납기 일정 등을 공동 연구했다. 이번 우선협상대상자 선정은 그 연구 성과가 실제 사업으로 이어진 첫 사례다.

HD현대가 SMR에 집중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조선업의 미래가 단순한 선박 건조를 넘어 에너지 플랫폼 산업으로 확장되고 있어서다. 국제해사기구(IMO)의 환경 규제가 강화되면서 선박 산업은 중대한 전환기를 맞고 있다. 과거 중유를 사용하던 선박은 액화천연가스(LNG) 추진선으로 이동했고, 최근에는 암모니아와 수소 추진선이 차세대 기술로 떠오르고 있다. 그다음 단계로 거론되는 것이 바로 원자력 추진선이다.

SMR은 대형 원전에 비해 규모가 작고 안전성이 높아 선박 적용 가능성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HD현대로서는 조선 기술과 원전 기술을 결합해 미래 선박 시장을 선점할 기회를 확보한 셈이다.

HD현대·테라파워 동맹, 차세대 원전 시장 겨냥

데이터센터 수요 급증에 SMR 전력원 부상

SMR은 일반적으로 전기 출력 300메가와트(MW) 이하의 원자로를 의미한다. 기존 대형 원전보다 규모가 작고 주요 설비를 모듈 형태로 공장에서 제작한 뒤 현장에서 조립할 수 있다. 건설 기간을 줄이고 초기 투자 부담을 낮출 수 있다는 것이 강점이다. SMR이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히 원전을 소형화했다는 점만은 아니다. 에너지 생산과 소비 구조 자체를 바꿀 수 있는 잠재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기존 대형 원전은 수 기가와트(GW) 규모의 전력을 생산하기에 대규모 송배전망이 필수적이다. 또한 안전문제로 인해 도심과 멀리 떨어진 지역에 건설해야 한다. 반면 SMR은 출력 300MW 이하의 소형 원자로로 공장에서 모듈 형태로 제작한 뒤 현장에 설치할 수 있다. 건설 기간이 짧고 초기 투자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다. 무엇보다 전력 소비지 인근에 설치가 가능하다.

최근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건설하고 있는 AI 데이터센터는 엄청난 전력을 소비한다. 챗GPT와 같은 생성형 AI 서비스가 확산되면서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가 폭증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 등에서는 향후 AI 산업 확대에 따라 안정적인 전력 공급원이 부족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SMR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평가받는다. 데이터센터 옆에 직접 설치해 전력을 공급할 수 있고,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을 보완하는 역할도 수행할 수 있다.

특히 HD현대가 협력하는 테라파워의 나트륨 원자로는 현재 개발 중인 차세대 원전 가운데 가장 진보된 기술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원자로는 물 대신 액체 나트륨을 냉각재로 사용한다. 액체 나트륨은 약 880℃에서 끓기 때문에 기존 경수로처럼 고압 환경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

또한 외부 전원이 끊어지더라도 중력과 자연순환, 공기 냉각을 통해 수동적으로 냉각할 수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원자력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가 안전성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한 기술적 진전으로 평가된다.

HD현대·테라파워 동맹, 차세대 원전 시장 겨냥


SMR 탄소 배출 적지만, 폐기물 문제 여전

원전은 발전 과정에서 사실상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다. 국제사회가 2050년 탄소중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원자력이 다시 주목받는 배경이다. 실제로 미국과 영국, 프랑스, 캐나다 등 주요국은 원전을 탄소중립 달성을 위한 핵심 전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다만 SMR을 무조건 친환경 에너지라고 보기는 어렵다. 원전인 만큼 사용후핵연료와 방사성 폐기물 문제가 여전히 존재한다.

이에 따라 SMR은 태양광이나 풍력과 같은 재생에너지라기보다는 ‘저탄소 전원’ 또는 ‘탄소중립 전원’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관점에서도 환경성과 에너지 안보, 경제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다.

현재 글로벌 기업들은 이러한 가능성에 주목하며 공격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테라파워 최대 주주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전 회장이며 SK그룹은 2대 주주다. SK이노베이션과 SK㈜는 2022년 이 회사에 2억5000만 달러를 투자했다. SK그룹은 2035년 상업화를 목표로 국내 최초 4세대 SMR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수력원자력, HD현대, 두산에너빌리티, 엔비디아 등도 투자자 또는 협력 파트너로 참여하고 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SMR의 ‘심장’ 부분인 핵심 주기기(RES) 모듈에 특화한 기술력을 보유했다. 쇳물을 붓는 주단조부터 정밀 가공, 조립까지 일괄생산체제를 갖췄다. 지난 3월 창원에 SMR 전용 공장을 세웠다. 현대건설 역시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 건설 경험을 바탕으로 SMR 사업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한국 기업들이 세계 SMR 공급망의 핵심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시장 전망도 밝다. 시장조사 전문 기관 포천비즈니스인사이트는 전 세계 원자력 시장 규모가 2025년 404억 달러에서 2034년 526억 달러로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중 글로벌 SMR 시장 규모(마켓앤드마켓)는 2030년 71억4000만 달러(약 10조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AI 데이터센터 확대, 전력망 안정화 수요 증가, 탄소중립 정책 강화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SMR 도입이 가속화될 가능성이 크다.

탄소중립과 에너지 안보, AI 시대의 전력 수요라는 세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시대에 SMR은 그 해답 가운데 하나로 부상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글로벌 원전 공급망 진입을 본격화한 한국 기업들이 서 있다.

신정은 기자 newyear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