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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AI·정년연장에 사라지는 '경력 사다리'
수습생 없는 공방에 장인만 남을라
시니어·신입 직무 재설계 서둘러야
이찬 서울대 첨단융합학부 산업인력개발학과 교수
시니어·신입 직무 재설계 서둘러야
이찬 서울대 첨단융합학부 산업인력개발학과 교수
그런데 노동시장의 입구에서는 다른 경고음이 울린다. 한국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6월부터 올해 6월까지 사라진 청년 일자리 28만5000개 가운데 26만8000개(94%)가 인공지능(AI) 노출도가 높은 업종에서 나왔다. 같은 기간 50대 일자리는 23만 개 늘었고, 이 중 17만3000개가 비슷한 고노출 업종에서 생겼다. 올해 9월에도 청년층(15~29세) 인구는 14만3000명 감소했는데 취업자는 14만7000명 줄어 인구 감소 폭을 넘어섰다. 청년층 고용률도 29개월 연속 전년 같은 달을 밑돌았다. 사다리의 위쪽은 붐비는데 아래쪽은 비어 간다.
물론 모든 책임이 AI에 있는 것은 아니다. 보고서도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과잉 채용의 정상화, 수시·경력직 선호, 재택근무로 커진 주니어 교육 부담을 함께 지목했다. AI가 이미 허물어지고 있던 경력 사다리의 해체를 앞당기고 있다는 것이다. AI가 가장 잘 대체하는 일은 매뉴얼화된 초급 업무, 곧 신입이 일을 배우던 자리다. 기업은 해고보다 신규 채용 축소로 대응한다. 해고 요건이 엄격한 국내에서는 더 그렇다. 그래서 이 변화는 뉴스가 아니라 통계 속에 조용히 쌓인다.
경력은 사다리다. 첫 칸을 밟아야 둘째 칸에 오른다. 정년연장이 사다리의 끝 칸을 늘리는 일이라면, AI는 첫 칸을 걷어내고 있다. 사다리는 위로 길어지는데 첫발을 디딜 곳은 공중에 떠 있는 셈이다. 수습생 없는 공방에서 장인의 정년만 늘리는 격이다.
더 큰 문제는 두 변화가 서로를 증폭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정년연장이 청년 채용을 위축시킬 것이라는 경영계의 우려는 엄살이 아니다. 사다리 끝 칸이 늘어나는 부담은 AI가 이미 약하게 만든 첫 칸으로 쏠리기 쉽다. 그렇다고 노동계의 소득 공백 호소도 외면할 수 없다. 어느 한쪽의 승리로 끝나는 입법은 사다리 전체를 흔들 뿐이다.
해결책은 무엇일까. 보고서에 따르면 AI가 사람의 일을 대신하는 ‘자동화’ 비중이 높은 업종일수록 청년 고용이 크게 줄었고, 사람의 일을 돕는 ‘증강’ 비중이 높은 업종에서는 감소가 완만했다. 같은 기술이 사다리를 걷어차기도, 다시 놓기도 한다.
그렇다면 정년연장은 다음 세 가지 설계와 함께 가야 한다. 첫째, 직무 중심 임금체계다. 연공서열을 그대로 둔 채 정년만 늘리면 늘어난 인건비는 신규 채용 축소로 메워질 공산이 크다. 둘째, 시니어의 역할 재설계다. 한은은 시니어가 암묵지를 바탕으로 AI를 활용해 생산성을 높인다고 봤다. 늘어난 시간을 ‘버티는 시간’이 아니라 노하우와 AI 역량을 나누는 ‘물려주는 시간’으로 바꿔야 한다. 셋째, 신입 직무의 증강형 재설계다. AI가 초안을 쓰면 신입은 그것을 검증하고 고객과 현장에 연결하는 일부터 배우도록 첫 칸을 다시 놔야 한다.
정년연장과 청년 고용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끝 칸을 늘리는 법은 국회가 만들지만, 첫 칸을 다시 놓는 일은 기업 몫이다. 리더들에게 묻고 싶다. 올해 우리 팀에 들어온 신입은 몇 명이고, 그들은 첫해에 무엇을 배웠는가. 내년에 그 일을 AI가 대신한다면 그들은 어디서 둘째 칸을 밟게 되는가. 우리 조직의 사다리는 지금 몇 번째 칸부터 비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