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국내생산세액공제 혜택을 받지 못하는 적자 기업에 ‘직접 보조금’을 지급하는 정책을 추진하지 않기로 방향을 잡았다. 지난달 이재명 대통령이 보조금을 선지급하고 나중에 세제 혜택을 받을 때 선지급액을 빼고 주는 ‘하이브리드형’ 세액공제를 제안했지만 내부 검토 결과 현실성이 높지 않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세액공제·보조금 병행 어렵다
5일 관계 부처에 따르면 정부는 내년 한국판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으로 불리는 국내 생산세액공제 제도를 신설하되 적자를 내는 기업에 직접 보조금을 지급하는 제도는 고려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생산세액공제란 기업이 국내에서 생산·판매한 물량에 비례하는 금액을 기업과 개인사업자가 내야 할 세금에서 빼주는 제도다. 기본적으로 과세당국에 납부할 세금이 있어야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법인세를 내지 않는 적자 기업은 세액공제 대상에서 제외된다.
2차전지, 태양광 등 생산세액공제를 적용하는 6개 업종은 초기 투자 비용이 커 적자를 면치 못하는 기업이 적지 않다. 이 때문에 생산세액공제 제도를 도입해도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기업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7일 한국형 녹색 대전환(K-GX) 국민보고회에서 “보조금을 일부 지급한 다음 나중에 이익이 나면 세액공제에서 차감하는 방법을 검토해보라”며 하이브리드형 생산세액공제 검토를 지시한 이유다.
하지만 정부는 지원 방식의 형평성과 실행 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따져본 결과 현실적으로 직접 보조금을 지급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내년부터 국내 생산세액공제를 시행하는데 제도 도입 초기부터 기업 상황에 따라 지원 방식을 달리하면 정책의 일관성이 훼손될 수 있다고 판단해서다. 일부 기업에는 세액공제 혜택을, 다른 기업에는 보조금을 주는 방식이 형평성 논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시장 재편 가능성도
지원 범위를 구체적으로 정하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정부가 하이브리드형 생산세액공제를 포기한 배경으로 꼽힌다.
2차전지만 해도 셀 제조업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 등으로 기업군의 범위가 넓고 사업별 특성도 제각각인데 적자라는 기준 하나만으로 지원 대상을 일률적으로 가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고용 실적 등 각종 요건을 추가하다 보면 기업별 보조금 산정 범위를 정하는 데만 상당한 행정력이 소요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했다.
정부가 세액공제액을 현금으로 돌려주는 직접 환급제 도입에 선을 그은 만큼 적자 기업에 남은 선택지는 사실상 이월공제뿐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정부안에 따르면 적자 기업은 앞으로 흑자가 날 때까지 최대 10년간 공제액을 이월할 수 있다. 10년 안에 법인세 납부액이 생기면 그때 세제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결과적으로 생산세액공제 제도를 시행하면 공제 혜택을 적용받는지에 따라 기업 간 가격 경쟁력에 상당한 차이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세액공제 혜택을 받는 기업은 혜택을 받지 못하는 기업에 비해 제품 가격을 인하할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투자은행(IB)업계 관계자는 “생산세액공제 대상 6개 업종에서 적용 대상 기업과 미적용 기업 간 인수합병(M&A)이 활발해질 것”이라며 “적자 기업이 줄어드는 방향으로 시장이 재편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