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냉장고의 소중함
1903년 미국 캘리포니아의 농부들은 북미 대륙을 횡단해도 시들지 않는 상추 품종을 개발하자 ‘빙산’이라고 이름 붙였다. 하지만 오랫동안 싱싱함을 유지하는 식자재는 어디까지나 특수한 사례였다. 20세기 초반까지 신선한 고기를 멀리 운송할 수단이 없던 미국의 축산업자는 소비처인 대도시 인근까지 살아있는 소떼를 몰고 가야만 했다.

18세기 중반 초기 형태의 기계식 냉장고가 등장하면서 식품을 장기간 보관하는 물꼬가 트였다. 하지만 일반 가정에 냉장고가 보급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1907년 뉴욕시 조사에서 상위 10%인 연 소득 800달러 이상 가구의 81%가 ‘냉장고’를 보유했다지만 그때까지도 냉장고는 그저 큰 통에 얼음을 넣은 것에 불과했다.

20세기 중반 이후 가장 빨리 보급된 가전제품은 냉장고다. 미국에서 냉장고 보급률은 1940년 44%에서 1960년 98%로 뛰었다. 세탁기 보급률이 2025년에도 85%에 불과하고, 오븐 보급률이 2009년에야 100%에 도달한 것과 비교하면 압도적인 보급 속도다. 한국에서도 1965년 금성사가 첫 국산 제품인 눈표냉장고(GR-120)를 선보인 지 20여 년 만인 1986년 보급률이 95%로 높아졌다.

냉장고가 인류 삶에 기여한 것은 식품 보존 기간을 늘린 것에 그치지 않았다. 냉장기술 덕에 식료품 가격이 낮아졌고 가격 변동은 작아졌다. 식재료도 장거리 수출입 품목이 됐다. 냉장고 덕에 질 높은 영양을 섭취하면서 서구 사회 평균 신장이 본격적으로 커졌다.

벨기에, 스웨덴, 아일랜드 등 유럽 각지의 슈퍼마켓에서 냉장고 온도가 급격히 올라가는 사건이 그제 발생했다. 지난달 프랑스 대형마트의 냉장고가 해킹돼 온도가 50도로 올라가 큰 피해를 본 것과 비슷한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해커들은 냉동·냉장 시스템을 원격으로 조작한 뒤 성에 제거 모드로 전환해 내부 온도를 높이는 방식을 썼다. 왜 이런 해킹이 일어났는지, 배후가 누구인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이번 해킹 테러는 그 위험에 대한 우리 사회의 경각심을 높이는 한편 그동안 당연하게 여긴 냉장고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계기도 되고 있다.

김동욱 논설위원 kimdw@hankyung.com